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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면 가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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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찰수(1902.11.12~1968.2.26) 애족장(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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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192 이찰수 선생은 1902년 11월 12일 구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속명은 이차금으로 표충사의 승려이다. 1919년 3월 20일 경 통도사의 말사인 표충사에 통도사 승려 5명이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뜻을 모으고, 선생을 비롯한 오학성, 이장옥 등 50여 명의 표충사 승려들은 사명대사의 춘향일 이기도 한 4월 4일 용회동 장날 만세운동의 치밀한 거사를 계획해 나갔다. 이장옥은 표충사의 법무계를 맡아보고 있는 서기 김종석에게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이라는 제목이 붙은 격렬한 문장을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 문장에는 '조선민족 대표 손병희, 김병조, 한용운, 백용성 외 29인의 신탁에 의해 우리들은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기로 맹세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선생은 같은 사찰 승려인 오학성, 손영식, 김성흡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5천여 명의 군중 앞에 나아가 나팔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군중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선생은 사전 계획에 따라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헌병주재소로 행진한 뒤 솔선하여 헌병주재소 사무실과 숙사에 돌을 던지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대구복심병원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같은 해 12월 10일 원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12월 17일 출옥하였다. 이후 선생은 1933년 8월 24일 오후 10시경 청도역 부근에서 시국에 대한 연설을 하려다가 청도경찰서에 검속되어 3일간 구류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