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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영우요 자는 백인이며 경남 혹은 남흥은 그의 호이다. 고령을 본관으로 하는 공의 상계는 고려 고종연간에 출생하신 성용공을 시조로 하여 2세 강승공, 3세 인재공, 4세 사경공, 5세 134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판서를 지낸 순은 덕린공, 6세 1383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를 지낸 호촌 포시공, 7세가 140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대제학과 공조좌참판을 지낸 암헌 신장공이다. 8세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선생은 공의 16대조이다. 14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지낸 고천군 휘 정공과 1558년 생원시에 입격한 영천군 휘 익공과 고평군 휘 수기공과 영원군 휘 절공은 모두 훌륭한 조상이다. 증조부는 가의대부로 성균관 대사성과 동지성균관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는데, 호가 담인이며 휘는 좌모이다. 조부는 사마시(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호는 석헌이고 휘는 승구공이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냈으며 휘가 창휴공이며, 어머니는 한산인 민식공의 따님으로 이숙원 여사이다. 1903년 10월 2일 한성 서서 여경방 자문계 자문동 4통 1호(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동에 있던 마을)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민했다. 고향인 문의 청룡으로 내려와 할아버지 석헌공 슬하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중 개화문명을 일찍 깨달은 공은 1910년 청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6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우리나라의 처지와 세계대세를 인식하기 시작한 공은 1919년 3.1독립운동 시위대열에 앞장섰고, 192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 가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유학하면서 무정부주의자 박열을 중심으로 신영우, 방한상, 홍진유, 서상경, 서동성 등과 흑우회를 결성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부모님의 뜻에 따라 청주보통학교(현 주성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나 슬프고 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곧 사직하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1925년 4월 21일 이복원, 신영우, 서상경, 곽윤모, 이창식, 한병희 등이 수문사에서 흑기연맹을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려다가 정보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1925년 4월 25일 서천순, 서상경, 곽윤모, 이복원, 홍진유, 신영우, 이창식, 한병희, 서정기, 이기영 등이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1925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1926년 11월 17일 만기출옥 후 1927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신석우 선생의 배려로 동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간회 조직에 참여,중앙위원에 피선되어 청주지회를 비롯한 전국 각 지방 조직에서 활약했다. 1930년 신의주 특파원으로 활약하던 중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자 직접 현장에 들어가 이를 취재 보도함으로써 국내외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이어 여순감옥에서 옥고 중인 단재 신채호 선생을 면회 위문하고 옥중 회견기를 보도했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 언론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문으로 정착되었다. 1933년 만주로 진출하여 한민족의 유일한 일간지인 만몽일보를 창간하여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합법적인 민족 계몽운을 펴기 위하여 만주제국협화회에 참여하여 오족협화의 낙토건설에서 한국민족의 생존권기반 구축과 민족문화 선양사업에 역점을 두고 활약하였다. 그 당시 동지로는 윤태동, 최근우, 이선근, 서범석, 진학문, 김우평, 신형식 등이다. 1945년 조국해방을 맞이하여 간도자추국가건설(또는 간도임시정부)를 준비하던 중 돌연 소련군에 의해 납치되어 지금까지 생사불명이다. 아! 공은 실로 우리나라와 더불어 풍진만장의 기구한 역사적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열강 외세의 침략으로 암운이 감돌 때 태어났고 을사보호조약, 경술국치 등 국가의 불운 속에서 성장하였다. 국가 의식이 싹트면서 학창생활을 뛰쳐나와 독립운동에 가맏하였다. 그 사상은 더욱 굳어져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비밀결사 혹은 합법적으로 일제와 투쟁하였으니 그 동안 전전한 여러 직장 모두 생활 목적이 아닌 활동의 무대에 불과했다. 조국광복과 아울러 많은 애국지사들은 앞 다투어 환국했건만 공만이 영광의 조국 땅을 맓지 못하고 도리어 이역만리로 유폐되었으니 참으로 공의 일생은 형극고 고난의 점철사라 하겠다. 공은 후리후리한 장신에 용모가 수미해서 귀공자형이었으나 품성이 외유내강하였고 백절불굴의 의지를 지닌 지사기질이 있었다. 특히 어학과 화술이 능해서 한중일어 모두 유창하였다. 굳은 신념에 그의 설득력은 대중을 감복시켰다. 강한 애족심은 많은 동포를 보호했으니 국내에서 일정학대에 못 이겨 웅지를 품고 만주로 찾아오는 많은 청년들을 자택에서 무한정 숙식을 제공하면서 직장을 알선해 주기도 하였다. 항상 "삼군이 장수를 빼앗길 수는 있어도 필부가 그 뜻을 빼앗길 수는 없다.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입지를 장려하고 실의를 경계하였다.' 공은 천성이 효제하였다. 만주에서 전전교거할 때 사당 대신 감실에다 신주를 모시고 제례에 의한 행사는 물론 집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참배를 잊지 않았다. 독립운동으로 인해 집에 있는 날이 없어 부모 시봉을 뜻대로 못 다한 한을 평생 품었으니, 피납되어 옥중에서 그의 술회한 한시 몇 편이 이를 대변한다. ... 중략 ... 부인 동복인 오복남 여사는 참사 병숙공의 따님으로 1922년 12월 20일 공과 혼인하였다. 부인 또한 현숙하고 부덕이 있어 효부로 현모양처로써 도를 다했으니 오늘날 그 명가의 문호를 보전함도 오직 그의 덕이리라. 3남 2녀를 두니 장남 웅식은 종가인 재종숙 명우에게 출계하였으나 6.25동란 중 행방불명이 되고 차남 언식은 육사 8기생으로 육군중위 때 6.25전란으로 전사하였으며 삼남 범식은 국학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졸업하여 현재 체신부 사무관이다. 큰 딸 혜식은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제자로 해외 공연 중 과로로 실신, 귀국하여 조졸하였으며 작은 딸은 가식인데 청송인 심종식에게 출가하였다. 석호, 민호는 그의 손이니 모두 3남의 소생이며 증손은 연수, 준수이고 증손녀는 정수이다. 아! 공의 피납이 30여년이다! 그 사행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어질까 염려한 범식군이 공의 상덕지문을 청하는지라, 철우는 일찍이 사는 곳이 서로 달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익히 그 훌륭한 명성을 들었고, 만주에서 공과 동고독락했던 형식공의 상세한 전언을 토대로 세보와 역사를 상고하여 그 사행의 대략을 간추려 훗날 고증에 기여하고자 한다. 을축 동 경운 철운 근찬 상기 행장은 1985년 겨울 경운 철우공이 지은 것을 수정 보완하여 셋째 아들 범식이가 아버님 전에 2017년 6월 24일(윤5월 1일) 엎드려 삼가 세워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