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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명성이 높아지자 도호의숙(桃湖義塾) 등 각지에서 선생을 초빙하고자 했고 문하생이 되고자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일제가 을미년(1895)에 명성황후 시해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단발령과 服制(복제) 개혁 등 전통체제를 파괴시키자 이에 격분한 제천지역 儒林(유림)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倡義(창의)하였으며 선생의 從叔(종숙) 允奭(윤석)께서는 아들 경선 중선과 함께 의병에 동참하여 군자금 헌납과 義陣(의진)을 지휘하셨다. 한편 선생은 을미의병 당시 유홍석 義陣(의진)의 군자금 모금에 참여하였고 직접 의병에 동참하고자 毅菴(의암)에게 가던 중 의병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되돌아갔다. 1905년 정월에 의암과 면암 최익현을 배알하여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강년 김상태 이소응 의병장 등과 장차 의병 활동의 방향과 시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庚戌國恥(경술국치)가 있던 해 선생은 '왜적의 종이 될 수 없다'며 의암을 비롯한 의병 가족 45가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1911년 2월 14일) 중국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하여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선생은 평생 衛正斥邪(위정척사)에 앞장서서 홀로 어려운 역경 속에서 斯文(사문)을 지키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많은 애국지사들과 交遊(교유)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血誠(혈성)을 다하셨으나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亡命(망명) 26년이 되는 1936년 5월 3일 이국땅에서 恨(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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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配位(배위) 光山盧氏(광산노씨)와 慶州李氏(경주이씨) 사이에서 孫(손)이 없어 姪子(질자) 泳德(영덕)으로 系(계)를 이었다. 泳德(영덕)은 1남2녀(범수 임수 영이)를 두었고 손 범수는 1남5녀(경택 경순 경숙 경임 경란 인성)를 두었으며 증손 경택은 남매(진규 자혜)를 두었다. 후손들이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모두가 명문가 후예답게 촉망받는 인재들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은 선생의 蔭德(음덕)으로 인한 것이다. 묘소는 중국 봉천성 본계현 성창황가보자(城廠黃家堡子) 구룡산(九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