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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는 황해 송화(宋禾)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인근 풍해면에서 한학자인 김삼풍(金三風)에게 3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신학문을 습득하기 위해서 4년제 풍천보통학교(豊川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다시 송화보통학교(宋禾普通學校)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20년 학교를 졸업하고 친척인 조용기(趙鏞基)가 경영하는 송화읍(松禾邑) 한약방에서 약방일을 도와주며 강의록에 의한 독학으로 공부에 몰두하였다. 20세가 되자 그는 1926년 3월 군청 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신천군청(信川郡廳)에서 근무하였다. 그해 6·10만세운동과 송학선(宋學先)의 금호문의거(金虎門義擧)가 일어나자 1926년 가을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도일(渡日)하여 명하풍웅(明河豊雄)으로 위장하고 일인 행세를 하며 대판(大阪)에서 전기회사의 전공과 메리야스 공장, 그리고 상점원 등으로 전전하면서 정세를 살피는 한편 야간 상공(商工)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어 1927년 11월경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기착지인 대만에 도착하였다. 대만에서 그는 그곳 역시 일제에 의해 자행되는 수탈과 행패를 목도하고 당시 대만 총독이었던 산상(山上)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일인으로 위장하고 대중시(臺中市)에 있는 일본인 지전정수(池田正秀)가 경영하는 부귀원(富貴園)이란 차포(茶 )의 농장에서 고원(雇員)으로 일하며 기회를 엿보면서 대만인 장천제(張天弟)로부터 보검도(寶劍刀)를 구입하여 독극물을 발라놓고 처단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8년 5월 대만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를 검열하기 위해 일왕 유인(裕仁)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까지 역임한 왕족 구이궁(久邇宮) 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陸軍特別檢閱使)로 파견되어 온다는 사실이 대만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이 나중에 상해에 가더라도 이보다 더 비중있는 침략의 괴수를 만나지는 못할 것이며, 더구나 대만 총독을 주살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니, 그보다는 오히려 비록 삼엄한 경비망이 펼쳐질 것이지만 환영인파가 들끓는 속에서라면 응징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드디어 그는 일본 정계의 거물인 구이궁(久邇宮)을 민족의 원흉으로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구이궁의 동정을 주의깊게 점검하여 구이궁이 1928년 5월 13일 대중시(臺中市)에서 하룻밤을 묶고 다음날 오전 10시 대중역(臺中驛)을 출발하여 대북(臺北)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구이궁이 지나갈 길을 면밀히 답사한 후 거사일인 5월 14일 독이 발린 보검도를 품에 숨기고 민족의 이름으로 침략원흉을 처단할 것이라는 굳은 결의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1928년 5월 14일 9시 55분 그는 대중시(臺中市) 대정정(大正町) 도서관 앞의 환송 인파 속에서 기다리다가 구이궁이 무개차(無蓋車)에 앉아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커브길을 돌기 위해 속력을 늦추는 사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보검도를 뽑아들고 차에 뛰어올라 심장을 겨누어 힘껏 찔렀다. 구이궁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보검도는 불행히도 그의 왼쪽 목언저리와 어깨를 찌르고 빗나가 운전사의 오른손등에 꽂히고 말았다. 그가 다시 칼을 뽑아들고 구이궁의 목을 치려는 순간 호위군경이 달려들어 그를 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결국 그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지만, 구이궁은 온 몸에 독이 퍼져 6개월 후 죽었다. 그는 2개월간의 심문을 거쳐 1928년 7월 18일 대만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28년 10월 10일 일제에 의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