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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은 충남 천안(天安) 사람이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한 흥사단(興士團)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5년 콜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이광수(李光洙) 등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조직하는 한편 잠시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1925년 9월 백남운(白南雲)·백관수(白寬洙)·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고 동년 11월에는 신흥우(申興雨)·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 등과 태평양문제연구회(太平洋問題硏究會)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펴나갔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그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32년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8.15 광복후에는 한민당(韓民黨)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경무부장(警務部長), 내무부장관, 민주당(民主黨) 대표 최고위원, 민의원(民議院) 의원 등을 역임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 중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