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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으며,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 그 해 연말에 독립협회가 해산 당할 때 일시 투옥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하였다. 1904년에는 신규식(申圭植)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의 이웃에 산동학당(山東學堂)이라는 신식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 장지연(張志淵)의 요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가 이를 비밀에 부치자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기표하여 이를 폭로 규탄하자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었다. 이에 양기탁(梁起鐸)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기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신문에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하였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그 밖에도 합법단체로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에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했으며,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에도 다수의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국문 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기의 『독사신론』(1908), 『을지문덕(乙支文德)』(1908),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1910, 실전)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과, 또한 일본 사학자들이 근대사학의 미명하에 『조선사(朝鮮史)』 등을 새로 저술하여 조선이 고대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 초기식민주의사관을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위한 정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고, 격렬한 필치로 한편으로는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 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근대민족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위의 저서들을 저술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을 한국민족에게 바친친 것이었다. 1910년 4월에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을 위하여 신민회 간부 일부를 망명시키게 되자, 그 일단이 되어 국외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1911년 12월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在亨) 정재관(鄭在寬) 등이 중심이 되어 교민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게 되자 그 주필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통하여 이 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된 1913년까지 노령과 만주의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문필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2년 윤세복(尹世復) 이동휘(李東輝) 이 갑(李甲)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회의 회장은 윤세복이었고 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는 1910년대의 중요한 독립운동 단체로 국내외에서 1918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14년에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失傅)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그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하여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립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승만이 2개월 전에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서 이에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제2회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9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였다. 1919년 10월에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남형우(南亨祐) 등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여 그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에 『신대한』지의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이주하여 박용만(朴容萬) 등 동지 50여명과 함께 『제이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그 내임장(內任長)을 담당하였다. 「제이회보합단」은 독립군단체 「보합단」을 계승한 단체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유일한 독립운동방략으로 채택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용만·신 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여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의 통일과 독립운동 노선의 무장투쟁 노선에로의 통일을 추구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의 지원을 받아 『천고(天鼓)』잡지를 창간하여 격렬한 필치의 언론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20년 4월에는 54명의 동지들과 함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공표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년 서울에서 간행),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년 서울에서 간행)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