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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만세시위 예감 < 의령에 만세시위 분위기. 헌병 7명 급파> (매일신보, 1919. 3. 16.)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의령 만세시위 맹렬 < 만세시위 발포. 10명 사망 12명 부상 군대 1명 부상> (매일신보, 1919. 3. 2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독립자금 모집자 통도사 학생 이석윤 공판 <4월초부터 양산군 등지에서 활동. 10월 14일 체포. 징역 8월 판결> (매일신보, 1919. 12. 2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3.28 양산 만세시위 <2천여명 만세시위. 주모자 체포 후 군중들 군청습격> (매일신보, 1919. 3. 30.)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만세시위 전개한 양산 통도사 전경 (1914)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의령읍 장날 만세시위 참여한 구여순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14 1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3월 14일 구여순 등이 주도한 의령읍 장날 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의거에는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적 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15일에도 의령향교 앞에서 1천5백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의령군청 직원인 정봉균이 시위 대 선두 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3월 16일 지정면 봉곡리 시장 장날 만 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의령 만세시위 선두에 선 군청 공무원 3월 29일 통도사 부속 보통학림 및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을 비롯한 40~50명과 통도사 불교 전수부 학생 약 10명은 하서면 신평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7일 양산읍 장날 의거는 엄주태 등 청년 5명이 주동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준비했고, 참여 인원은 3천여 명 정도였다. 4월 1일에도 양산읍내에서 2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양산지역의 만세시위는 이후 세금납부 거부, ‘일본인 상품 불매’ 등의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양산 통도사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