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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가 일어났던 마산전경 엽서 「출처 창원시립마산박물관」 3.21 구마산 만세시위 <50여명 체포. 어린이와 여자 다수> (매일신보, 1919. 3. 2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4.3 창원 만세시위 <진전면 군중 수백명 시위 참여. 사상자 30여명> (매일신보, 1919. 4. 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07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창원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오랫동안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창원의 가장 격렬했던 만세시위는 4월 3일 일어 난 삼진 (진동·진전·진북면) 의거였다. 변상태 등이 주도하였고, 약 3천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총을 쏘았고, 8명의 의사가 만세시위 현장에서 순절하였다. 3월 3일 마산 두척산 독립선언서 배포, 3월 10일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3월 21일 구마산 장터 만 세시위가 3월 26일과 3월 31일에도 계속되었다. 설관수와 배중세 등은 3월 23일 창원읍 장터 의거를 주도했고, 4월 2일에도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3일 진해 웅동에서도 의거가 일어났다. 4월 22일에는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외쳤다. 창원 8명의 의사 만세시위 현장에서 숨지다 삼진 의거 현장에서 숨진 8의사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앙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