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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54 55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김명시를 포함 7명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 (매일신보, 1932, 8, 29.)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김명시(金明時(金喜元), 1907~1949) 마산사람이다. ‘조선의 잔다르크’, ‘백마 탄 여장군’ 이라 일컬어진다. 1925년 10월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30년 5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 습격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정금자(鄭錦子, 1911~2007) 하동사람이다.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7일 오전 9시 일신여자고등보통 학교 및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 500여 명과 함께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날 밤 무기동맹휴학을 선언하고 해산하였다. 1월 25일 동료학생 이을례와 함께 또 다시 시위운동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31년에는 부산 조선방직회사에 취업해 김계정, 제영순, 조복금 등과 함께 파업을 주도했다. 부산 방직 파업관련 여공 두명 검거 (매일신보, 1931. 5. 8.)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통령표창 박덕실(朴德實, 1901~1971) 진주사람이다. 1919년 6월 상해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운동 추진을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진주지부’에서 활동했다. 9월에는 대한적십자회 대한지회 진주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0월에는 홍수원(洪秀瑗) 등이 비밀결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했는데, 광림학교 교사였던 박덕실은 학교 내 자택이나 기숙사를 모임의 장소로 제공했다. 1920년 통영부인회 부회장으로서 제1회 강연회때 ‘조선 여자여, 춘몽(春夢)을 각성(覺醒)하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진주여자 청년회 임원으로 활동하던 1926~27년에도 야학회를 개최하여 여성 교육을 위해 노력했고, 1927년 근우회 진주지회 설립대회를 이끌었다. 박덕실 판결 기록 (1919년) 「출처 국가기록원」 대통령표창 이금복(李今福, 1912~2010) 고성사람이다. 1934년 8월경, 부산에서 목도조선법랑철기주식회사 (牧島朝鮮琺瑯鐵器株式會社)에 여공으로 취직하였다. 이때 정충조(鄭忠朝)의 권유로 적색노동조합 재조직에 적극 참여하였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38년 삼천포를 중심으로 적색농민조합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30일 진주지청에서 삼천포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비공개 심리. 판결 <이금복 징역 1년> (조선시보, 1939. 9. 3.)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통령표창 제영순(諸英淳, 1911~1991) 하동사람이다. 진주에서 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했다. 1928년 7월 1일 근우회 하동지회가 설립될 때 서무재정부를 담당했다. 1929년 하동청년동맹 여자부장이 되었다. 부산진의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5월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풀려났다. 출옥 후 부산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했다. 1931년 6월경 조복금(趙福今) 등과 함께 『노동자』라는 신문과 격문 약 150부를 인쇄하여 각 공장의 노동자에게 배포하였다. 제영순 판결 기록 (1932년) 「출처 국가기록원」 건국포장 이소선(李小先(李菊嬉), 1900~미상)·정막래(丁莫來, 1899~1976) 통영 기생조합소 기생이었다. 1919년 4월 2일 이소선과 정막래가 주도하여 ‘기생단’을 조직했다. 정막래는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중에 입는 옷(소복)과 짚신을 사서 동료에게 나누어 주었다. 기생들은 4월 2일 오후 3시 30분께 부도정(지금의 통영중앙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두 사람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소선, 정막래 판결문 (1919년) 「출처 소외된 역사, 경남여성독립운동」 대통령표창 대통령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