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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48 49 김동우(金東寓, 1896~1988) 남해사람이다. 1919년 서울 만세시위 때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하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무력양성 계획에 착수하여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인 ‘맹호군’을 창설하였다. 김동우의 상해국민대표회담 (신한민보, 1923. 4. 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장두관의 경력 및 약력 「출처 변지섭수집자료」 장두관(張斗爟 , 1900~1958) 진주사람이다. 3·1운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르고 1919년 6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1929년 동아일보 김해지국 주최 한글강좌 기념사진 「출처 김해시청」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들의 모습 (둘째 줄 왼쪽) 「출처 의령문화원 『2019년 의령문화원 학술발표회 - 의령의 인물과 학문(Ⅳ)』, 2019.」 이극로(李克魯, 1893~1978) 의령 사람이다. 1929년 『조선어사전』(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해방이후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했다가 북한에서 활동했다. 이윤재(李允宰, 1888~1943) 김해 사람이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했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 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모진 고문으로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이우식 「출처 의령문화원, 『남저 이우식의 민족 독립운동』, 2016.」 소요사건 출옥자 동정 (1919. 11. 18.) 「출처 국가보훈처」 이우식(李祐植, 1891~1966) 의령 사람이다. 의령읍 장날 의거를 주도한 다음 상해로 망명했다. 1920년 귀국하여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했으며,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 (張鉉植)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을 지원 하였다.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교육·문화운동가들 독립장 애족장 애족장 독립장 임시정부 제34차 의정원회의 기념사진 (앞줄 맨 오른쪽) 「출처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밀양의 항일독립운동가』, 2014.」 김원봉(金元鳳(若山), 1898~1958) 밀양사람이다. 의열단·조선의용대를 이끌며 항일무장투쟁을 주도 했다. 1919년 12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칠가살(七可殺)에 해당하는 자들 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매국적 친일 파 거두 등이었다. 만주와 상해, 남경 등지에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을 지속하였다. 1938년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이 되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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