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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두 판결문 (1942년) 「출처 국가기록원」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42 43 독립운동가들 만세시위 참여로 예심에서 출판보안법위반 3개월 구형 (매일신보, 1919. 9. 1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좌) 안지호 건국훈장증 우) 안지호 포창완의문 「출처 함안박물관」 박맹두 (朴孟斗(新井孟斗), 1926~1943) 통영출신이며, 소년 항일운동가이다. 17세 때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1941년 일본인이 세운 어업침탈 핵심 기관인 광도온망조합(현 기선권현망수협)에 근무하면서 온망조합 창고 벽에 먹으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옥살이 중 1943년 1월 23일 사망했다. 애국장 안지호(安智鎬, 1857~1922)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조선총독에게 조국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내었다가 검거 되었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 의거를 주도하였다.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아 옥살이를 하던 중에 순절하였다. 옥중에서 자위가(自慰歌)를 지었다. “ 슬프다! / 조국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금수와 같은 난신 역자가 / 후작과 백작이 되어 적과같이 날뛰고 있다… / 맹세컨대 하늘을 이고 살지 않으리라 / 죽으면 영화가 되고 살면 욕이되니…” 독립장 이교재(李敎載, 1887~1933) 창원 삼진 의거를 주도했다. 상해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활동하다 1933년 옥중에서 순절했다.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1982년 3월 1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백범 김구는 해방후인 1946년 9월 17일 이교재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 다. 상해 임정에서 경상남북도 대표로 위임한다는 위임장 「출처 창원시립마산박물관」 “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요 기 꺽일 줄 있으랴만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독립장 배동석(裵東奭, 1889~1924) 김해사람이다.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마산과 칠원지역의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김해로 와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30일, 4월 2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2개월 후 33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애족장 변상태 판결문 (1922년) 「출처 국가기록원」 변상태(卞相泰(卞敬宰), 1889~1963) 창원사람이다. 변상태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함안, 창원, 고성 등의 동지들을 불러 모아 시위를 모의하였고, 창원 진동 시위(3월 28일), 삼진 시위(4월 3일)를 주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 의거의 주동자인 이강우, 김재화, 합천의 이원화, 거창의 신종목 등과도 사전에 연락하고 모의하여 운동의 지역적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애족장 이원열(李元烈, 1896~1927) 하동사람이다.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기자로 활동했다. 1921년 국내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출옥이후 하동노농연합회에서 활동하고, 1925년 11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6월 사망하였다. 이원열의 약력 「출처 변지섭수집자료」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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