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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 일어난 함안읍 전경 (1915)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창녕 영산면 결사 대원 출옥 후 모습 「 출처 영산 3·1독립운동유족회, 『영산 3·1독립운동소사 봉화』, 1979.」 결사단원 남경명 등의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함안 만세사건 주모자 안지호 신문조사 기록 (1919. 3. 20.) 「출처 함안박물관」 16 17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3월 13일 천도교인 구중회, 장진수, 김추은 등을 중심으로 영산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구중회 등 23명의 주도 인물들은 결사단을 조직하고, ‘결사단원맹세서’에 서명 날인했다. ‘무쇠 팔뚝 돌주먹 소년 남아야 ,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라는 소년행진가를 부르고, 종과 북을 울리며 영산면 중심지를 행진했다. 3월 18일에는 남지리 장날 의거가 전개되었다. 3월 20일 군북 의거는 함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중에서 가장 격렬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5 0여 명의 학생들에 의해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참여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이 시위대 를 해산 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20명이 순절했다. 함안지역에서는 3월 9일 칠북 연개 장터 의거, 3월 12·17일 대산 평림 의거, 3월 18일 칠서 이룡리 의거, 3월 19일 함안읍 의거, 3월 20일 군북 의거, 3월 23일·4월 3일·4월 8일·4월 13일 칠원 의거 등이 34일간 지속 되었 다. 창녕 23명의 결사대가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함안 군북 의거,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3.19 함안 만세시위 < 19일부터 날마다 시위. 밤에 중포병대에 의해 진압. 함안군수도 구타. 30여명 구속> (매일신보, 1919. 3. 2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결사단원맹세서 “ 금 일 오 등 (吾等)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주권국을 전취(戰取) 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 독립을 한사코 전취 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서명날인 함.” (독립운동사 제3권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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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