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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兄弟 功績碑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형제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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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이경희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5월 10일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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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 이강희는 경남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5월 당시 상해학생회(上海學生會) 및 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원(경상도)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25년 12월 23일 유호(留 )학생회장으로서 재상해선인학생회(在上海鮮人學生會)를 개최하고 윤 해(尹海)·주요섭(朱耀燮)·박헌영(朴憲永) 등을 초빙, 강연케 하였다. 귀국후 그는 1928년 5월 20일 경북 대구에서 노차용(盧且用)·장택원(張澤遠)·정태봉(鄭太鳳)·유상묵(柳尙默)·문상직(文相直) 등과 함께 'ㄱ당'을 결성하였다. ㄱ당은 뜻있는 청년들을 규합,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유학시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만주방면 미간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을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재무부·조사부·연구부의 부서를 두었는데 그는 조사부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위의 목적하에 활동 중 그는 1928년 7월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었다가 1929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그는 붙잡히기 전에도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釜山支會) 총무간사, 부산노우회(釜山勞友會) 서무간사(庶務幹事), 부산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