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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장과 經術(경술)을 모두 칭송하였다 高麗(고려) 禑王六年(우왕 6년)(一三八0年:1380년) 庚申(경신)에 進士(진사)로서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고 장차 고향으로 覲親(근친)할제 牧隱(목은) 李先生(이선생)이 李壯元(이장원)이라 부르고 字說(자설)을 지어 주며 中庸(중용) 읽기를 권면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李壯元(이장원)이라 칭호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李太祖(이태조)가 혁명함에 미처 옛날 潛邸(잠저)의 친분으로서 불러 들여 諫議大夫(간의대부)를 삼았고 楊廣道按廉使(양광도안렴사)에 임명했으며 判校書監事(판교서감사) 左承旨(좌승지) 都承旨(도승지) 尙瑞尹(상서윤) 簽書義興三軍府事(첨서의흥삼군부사)를 역임하였다 太宗(태종)이 王位(왕위)에 오름에 맨 처음 議政府文學(의정부문학)에 拔擢(발탁)하였고 司平府右使(사평부우사) 藝文館提學(예문관제학) 및 大提學(대제학)과 司憲府(사헌부) 大司憲(대사헌) 大司寇(대사구)(刑曹判書(형조판서)를 말함) 大宗伯(대종백)(禮曹判書(예조판서)를 말함) 大司徒(대사도)(戶曺判書(호조판서)를 말함) 叅贊議政府事(참찬의정부사)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 首領官(수령관)을 역임하였으며 使臣(사신)으로는 賀正使(하정사) 進獻使(진헌사) 伴送使(반송사)를 겪었고 外職(외직)으로는 開城留後(개성유후)와 京畿(경기) 嶺南(영남) 湖西(호서) 西北地方(서북지방)의 觀察使(관찰사)를 지냈다 乙酉年(을유년)(太宗五年: 태종 5년) 四月(4월)에 때아닌 서리가 내려 임금께서 自責(자책)이 심하거늘 공이 마침 禮曹(예조)의 長官(장관)으로 있다가 아뢰기를 「殿下(전하)께서 마땅히 하루 하루 謹愼(근신)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시옵소서」하니 批答(비답)하시기를 「참소하는 말이 행하는가? 백성의 원망이 있는가? 하늘의 꾸지람이 어찌 이다지 심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叅贊(참찬)에 승진시키고 그 淸白(청백)하고 忠勤(충근)함을 알아 方伯(방백)의 직책을 맡겨 두 번 嶺南(영남)을 按察(안찰)하고 한편 湖南(호남)을 按察(안찰)하여 高麗(고려) 末葉(말엽)의 弊瘼(폐막)을 제거하니 南方(남방)의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소생하였다 공이 일찍이 修齋治平之道(수재치평지도)를 躬行(궁행)하여 유교를 선양함으로써 급선무를 삼으니 사림의 풍습이 새로워졌으며 그의 이룩한 공적이 嶺南(영남)과 湖南(호남) 지방에 가장 컸었다. 廟堂(묘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는 黃喜(황희)와 許稠(허조)의 사이에 넘나들어 밝은 세대의 제도를 이룩하였고 藝文館(예문관)의 重任(중임)을 주관하여는 卞季良(변계량)과 尹淮(윤회)로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여 태평성대의 문장을 빛내어 蔚然(울연)히 한 세대의 名臣(명신)이 되었다. 벼슬이 비록 높았으나 매양 겸손한 공도를 지켰고 충효와 淸白(청백)함으로써 자제를 가르쳤다 왕실과 姻戚(인척)을 맺어 세상에서 金張勢家(김장세가)라고 일컬었으나 항상 盛滿(성만)함으로서 警戒(경계)를 삼았다 일찍이 長興(장흥)의 아름다운 水石(수석)을 사랑하여 여기에서 거닐며 즐거워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令名(영명)을 보전하였다 太宗(태종) 十四年(14년) 甲午(갑오)에 세상을 떠나니 享年(향년)이 五十七歲(57세)였다. 임금께서 슬퍼하사 朝會(조회)를 철폐하고 관에서 禮葬(예장)을 주관하게 했으며 특별히 領議政(영의정)을 증직하였고 兼職(겸직)을 前例(전례)에 준하였다 太常寺(태상사)의 諡法(시법)에 의하여 어진이를 높이고 義(의)를 귀하게 여기며 마음으로 義(의)를 절제한다는 恭度(공도)의 시호를 내렸다. 道內(도내)의 사림들이 그 공도를 사모하고 덕행을 흠앙하여 西溪書院(서계서원)과 道川祠(도천사)와 金溪祠(금계사)에 향사하였다. 配(배)는 貞敬夫人(경경부인) 忠州崔氏(충주최씨)니 侍中(시중) 良靖公(양정공) 濂(렴)의 따님이요. 묘는 공의 묘와 上下墳(상하분)으로 모시었다. 자녀는 무릇 六男三女(6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孝仁(효인)은 戶曺判書(호조판서)요 차남 孝義(효의)는 工曹判書(공조판서)며 삼남 孝禮(효예)는 禮曹判書요(예조판서) 四男(4남) 孝智(효지)는 同知敦寧府事(동지돈녕부사)며 오남 孝信(효신)은 判敦寧府事(판돈녕부사)요 육남 孝常(효상)은 知敦寧府事(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장녀는 尹璠(윤번)에게 출가했으니 坡平府院君(파평부원군)으로서 貞熹王后(파평부원군)(世祖(세조)의 왕비임)를 탄생하였고 차녀는 柳介同(유개동)에게 출가했으며 삼녀는 文科及第(문과급제)인 邊永仁(변영인)에게 출가하였고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연대가 이미 오래되어 문헌의 결손된 바가 많았고 저술한 時文(시문)도 유실되어 전하지 못했으니 이는 후인의 한탄이 되는 바이다. 그러나 쌓아 놓은 음덕이 후손에 미치어 번영하고 창성했으니 積善(적선)한 자의 보답이 여기 있는가 보다 인하여 銘(명)을 지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