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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이토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 주효했는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고영근은 감형되어 1909년(일자는 미상) 형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고종 승하(1919년) 후 2년여가 지난 1921년, 고영근은 금곡리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명됐는데 그는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종 승하 후 4년 가까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를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高宗太皇帝’ 등 여덟 자를 더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운 것이다. 난처해진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의 궁내성과 협의한 끝에 다음해인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3·1만세운동 직후 능비문제로 다시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참봉직에서 물러난 다음해 병으로 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금곡 숲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냈는데, 병으로 죽자 뼈를 태왕(고종)의 능 밑에 묻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는 고영근. 그는 이렇게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