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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생인 고영근은 상민 출신으로 민씨가(家)의 실력자였던 민영익가의 청지기, 즉 시중꾼으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직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1903년 10월28일, 고영근이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고영근은 자신이 결코 자객이 아님을 열심히 설명했고 우범선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자 자신도 구레에 살고 싶으니 방을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풀어진 우범선은 고영근을 자신의 집에 사흘간 기숙시키며 살집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그 사이 고영근은 은밀히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24일 저녁 6시경, 고영근과 노윤명 그리고 우범선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새로 구할 방을 결정하고 집주인과 계약을 마친 것을 이유로 고영근이 우범선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제안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한 시간쯤 경과한 뒤 고영근이 슬며시 일어나 품속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몸으로 우범선을 덮쳐 턱과 목 등을 수차례 더 찔렀다. 그 순간 노윤명이 준비해두었던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난타했다. 우범선은 즉사했다. 당시 우범선의 나이는 47세,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만 8년1개월, 일본으로 망명한 지 7년 10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였다. 둘은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곧바로 인근 와쇼마치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