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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우범선은 당시 일본 교관이 지도하는 별기군의 간부로 일하던 중 극심한 모멸을 당하자 사직한다. 이 같은 굴욕이 민씨 일파 등 수구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을 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우범선에게는 처와 딸 둘이 있었다. 그는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요시찰한국인거동(要視察韓國人擧動)’ 자료에 따르면 우범선의 망명 뒤 행적은 미우라 등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일본인사들과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우범선은 도쿄의 혼고에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라는 열다섯 살 어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미우라는 나카의 중매인이 우범선의 인품에 대해 묻자 “좋은 친구이지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사내야. 이 점을 감안해서 중매를 서주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우라는 우범선이 조선에서 온 자객에게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4월 장남 장춘이 태어난 후, 우범선은 1898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처의 언니 부부가 사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와쇼마치로 이사했다. 출처 : 신동아 2009년 9월호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