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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조국독립의 항일정신을 갈렬하게 불태우고 있던 중 당년 26세되던 해 기미 3.1 만세독립운동이 삼천리 근역 방방곡곡을 진동시킴을 보시고 의거의 결행을 결심하시었다. 즉 1919년 4월 4일 일본인교장과 수석훈도가 출장간 것을 기회로 만경보통학교 4년생인 오연길 이형재 이승필 서봉원 장태석 김형태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명하고 전교생을 교정에 집합케 한 후 오늘은 만경장날이니 모두 장터로 나가 장터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하시고 공이 직접 선두에 나아가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시며 조선독립만세를 드높이 외치시니 학생과 군중이 하나가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기세충천한 만세소리는 왜경을 혼비백산케 하였다. 공은 바로 학생대표 6명과 함께 체포되어 동년 5월 14일 군산지청법정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공은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동년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 상고하여 형기를 2년으로 감형하였다. 그 후 재차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원심대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시었다. 공은 그후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증평리 925번지로 귀향하시어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뜻을 모으시다가 옥중 고문과 악형으로 인한 병으로 조국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17일 향년 52세를 일기로 소천하시니 오호통재라!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심신을 바처오신 공은 광복의 영광을 못 보시고 가시니 가신 님의 혼백을 영녕시킬 수 없음이 한스럽도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의 위업을 인정하여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유 자손으로는 비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사자로 원의 형의 이의 찬의 송의가 있고 종손으로 진영이가 있다. 이제 공의 위거와 혁혁한 공훈을 영구히 기리고 세인과 후학의 귀감으로 삼고저 이 비문을 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