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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다는 식의 천박한 가치관이 버젓이 복음의 탈을 쓰고 선포되는 게 옳은가? 성경 해석에서 흔한 오류 중 하나는, 창조 기사 의 핵심을 처음 6일로 보고 마지막 날은 여백 정 도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6일째 끝나고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어서 7일째 쉬신 게 아니다. 그분의 창조는 7일째 끝났다. 더 하실 일 이 없어 쉬신 게 아니라, 안식을 포함하고 지향 한 창조였다. 그래서 제7일을 특별하게 구별하 신 것이다. “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 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 2:3) 쉼과 안식의 개념이 약한 것은 곧 구원론이 약 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이 구원을 현재와 미래의 안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 리서 4장은 안식과 구원을 상호교차적 개념으 로 사용한다. 종말적으로 완성될 안식 개념 “ 그 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 니 ” (히 4:11)뿐 아니라, 현재적 안식구원-영생 의 개념을 표현한 말씀이 병행된다.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히 4:3); “ 이 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 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 (히 4:10). “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 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 도다.” (전 3:11~12) 이생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건 지금 여기 살아가 는 목적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리스도인과 교회 는 ‘ 복음의 증인’ 이란 정체성으로 이 세상에 잠 시 머문다. 영원한 안식(구원)을 지향하는 자의 삶이 종말적 영생의 질을 반영할 때 비로소 증인 의 자질을 갖춘 셈이고, 그런 자질을 가진 자라 야 절망적 일 중독의 늪, 예를 들어 헬조선에 빠 진 수많은 이들에게 소명이 될 수 있다. 유물론 적 배급 주의를 포함한 천박한 가치관과 “ 잠은 죽어서 잔다는 식의 근거 없는 궤변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일과 쉼의 균형 을 유지하는 건강한 삶이 모든 증인에게 요구된 다.” 요즘은 세상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 소확 행 ’ 을 추구하고 있는데 우리의 쉼은 그보다 훨씬 탁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은 청지기로서 게으르 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자세가 필요한 만큼, 하 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라 적절히 쉬고 재충전 받 는 균형도 경건한 삶의 필수 요건이다. 마르다가 견지한 ‘일 중심성’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을 경청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쉼과 섬 김의 균형을 유지한 마리아의 지혜가 요구된다. 우리가 일할 때뿐 아니라 쉴 때도 하나님의 일 은 진행되고, 그분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목회자들의 목회자’ 란 별명을 가잔 유진 피터슨 은 “ 쉬지 않는 사역자가 가장 교만한 사역자” 라 고 종종 말했다는데, 이는 마치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는 양 치부하는 오만이기 때문이다. 사역과 쉼의 균형은 일 중독을 강요하 는 시대정신에 맞서는 counter-cultural 성경 적 사역 원리다. 여 는 글 쉼이 실종된 세상과 교회를 향한 고언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온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다. 실상 몸살을 앓는 건 피조세계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숨 가쁘게 달려온 산업사회의 톱니바퀴가 범유행 때문에 반강제 적 작동 중지가 되어 곤혹스러워하는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피조 세계에서는 희년의 안식을 누 리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고, 활동과 동선이 제한 된 인간들에게도 ‘ 강요된 쉼’ 이 주어졌다. 인간 이 예전처럼 일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멈추기는 커녕 되려 소생하는 역설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인간이 피조세계에게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되 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는 현 상황이 우리 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거의 분주한 일상과 사역 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기보다 이런 상황을 허용하시는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분별하는 일 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형통한 날에 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 (전 7:13~14) 세간에 잘 죽기 위한 ‘ 삶숨쉼’ 이란 프로그램이 있어 놀랐다.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양질의 삶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던 세상 이 죽음을 준비한다는 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 렇다.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 출생은 끝을 향한 대장정의 시작인 셈인 데, 세상은 끝을 육체의 죽음으로 보지만 성경 은 영원한 안식으로 본다. 육체적 죽음을 단순히 삶의 시한 만료라는 부정 적 개념으로만 볼 게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삶의 지향점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역설적 으로, 살지 못해 죽는 게 아니라 바른 죽음을 향 해 잘 살아야 한다. 성경은 죽음을 영원한 안식 으로 가르친다. 이생의 삶은 영원한 안식을 지향 하는 여정인 셈이다. 일 중독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로 여겨지기보다 자랑거리로 둔갑했다. 잘 살고 못 사는 건 경제 의 이슈가 아니라 삶의 질에 관한 것이다.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의 삶 만족도가 오히려 높게 나 타나는 반전을 놓고 우리네 현주소를 심각히 재 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예수 믿으면 잘살게 된 정민영 | 인터서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