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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독립만세운동 □ 3.13 밀양면 만세운동(3월 13일) - 3.1운동을 직접 경험한 윤치형, 윤세주가 스승 을강 전홍표와 논의하여 장날인 3월 13일(음 2월 12일) 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만세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고, 밀양 만세운동의 시금석이 되었다. □ 밀양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3월 14일) - 3.13 밀양면 만세운동에 고무된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 전교생(당시 1~4학년제) 160여 명이 교사들의 만류에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자랑스런 어린 만세꾼들의 저항이었다. 이들 중 147명이 퇴학을 당했다. □ 유림 만세운동(3월 15일) - 3.1운동 당시 유림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밀양의 유림들은 시회(詩會)를 빙자하여 수천 명의 유생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이들이 손에 들었던 태극기는 여성 기독교인이 만들어준 것으로 종교적 갈등마저 민족운동에 걸림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안희원 장례 만세운동(3월 20일) - '언론이 빼어나고 기상이 너그럽다'고 알려진 시헌 안희원은 성호 이익의 문집을 간행한 학자이다. 그가 죽자 장례 행렬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이 밀양장터를 지날 때 상여소리 대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선생의 기상과 밀양인의 의기가 울려퍼졌다. □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만든 단체인 밀양소년단 단원들이 영남루에 모여 시위를 계획하고, 무안가도(현 점필재로)에서 북문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들의 평균 나이는 15~16세였다. □ 단장면 용회리 장터 만세운동(4월 4일) - 사명당의 뜻을 이은 표충사의 스님과 연민들이 춘향일을 맞아 일제에 저항의 깃발을 올린 투쟁으로,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와 경작권을 박탈 당한 농민들은 이전과는 달리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에게 위해를 가했으며, 그들 스스로 [선서]라는 격문을 만들어 활동한 매우 큰 규모의 만세시위였다. □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4월 6일) - 평양에서 이주한 기독교인의 집성촌인 부북면 춘화리에서 김씨 집안이 중심이 되어 인근의 청운리와 덕곡리 주민들이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0일) - 다른 지역과는 달리 광산업을 하는 일본인의 집단촌이 형성된 청도면에서 그들을 몰아내고자 직접 일본인에게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외친 대범한 만세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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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독립만세운동 □ 3.13 밀양면 만세운동(3월 13일) □ 밀양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3월 14일) □ 유림 만세운동(3월 15일) □ 안희원 장례 만세운동(3월 20일) □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 단장면 용회리 장터 만세운동(4월 4일) □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4월 6일) □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