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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에 언양, 상북, 삼남, 두동, 두서 등 구 언양현의 5개면에서 모여든 군중 이천 여명은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당일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총칼에 많은 애국지사가 순직하거나 체포, 투옥되는 희생을 치렀다. 당일 41세의 장년인 공은 핵심 행동대원으로서 사재를 기부하며 활동자금을 충당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동지들과 함께 울산경찰서로 송치되어 심문을 받고 많은 고초를 당한 후에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태형 90도를 선고를 받아 울산경찰서에서 형 집행처분을 당하셨다. 출감한다는 연락을 받고 문중에서 울산까지 오십리 길을 소달구지를 끌고 가보니 볼기가 터지고 물집이 생겨 걸음을 걷지도 않지도 못하여 공은 달구지에 실려서 귀가 하셨다. 그 휴유증은 지병이 되어 남은 생애 30여년을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후손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임진년(1953년) 음력 4월 8일 운명하시다. 그러나 삼일운동 기념비(1992년)에는 공의 활동내역이 기록되어 잇으나 독립운동 관련 자료의 검증이 늦어져 거사 후 90여년이 지난 2010년에야 나라에서 그 공적를 인정하고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표창장과 국가유공자증을 추서하였다. 아! 공의 나라를 위한 희생이 없었던들 어찌 국권을 도로 찾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공의 숭고한 애국애족충정을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고 항일독립운동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공적비를 봉헌합니다. 2012년 4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