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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이 지극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가슴에 가득찼다. 일찌기 청운에 뜻을 품고 서울 휘문의숙에 진학 수학 후 향리에 돌아와 불구영달하고 양정의숙을 사설하여 후진교육에 힘쓰면서 오직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내 고장 내 손으로 내 조국 내 몸으로 보호하는 애국의 큰 길을 찾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기미 3.1독립만세운동 언양지구 의거를 주도하여 유림대표와 천도교대표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 모의하여 각기 소임을 분담 준비하고 기미 4월 2일 언양 시일을 기해 거사하여 이날 수천 민중의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 문화민임과 독립을 온 세계에 선포하여 오천년 민족사의 이울지 않는 꽃을 싱싱히 피게 파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에 무차별 총격을 하는 일군의 만행을 항쟁타가 공은 현장에서 피포되어 2년 실형을 받고 다른 동지들도 거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평생을 일제의 감시 압제 속에 기수 많은 나날을 지내야 했던 크나큰 희생은 불망의 경모를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광복 이후 정부의 혼란으로 이 멸사보국의 의절이 빛을 보지 못한 채 공은 신축 9월 15일 한많은 세상을 종하니 통탄불기로다. 기 실제인 갑종옹이 공의 3.1 유공자료를 모아 보훈당국에 청원하여 1990년 12월 26일자로 훈장증 제1856호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게 됨은 당연한 일로 축복받은 것이다. 공의 배는 경주김씨 성탁의 여이니 ... 중략 ... 공의 애국단충의 높은 심행을 존경하는 바라 한갓 불문을 탓하고 굳이 고사할 수 없어 머리에 행장을 적고 끝에 가시 4장을 붙여 명사에 대하기로 하였다. 지축이 흔들리고 산천초목도 떨리던 이 강산 이 고장에 태극기 휘날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