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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옥여 풍천임공 경재 추모비 공의 휘는 경재이며 옥여는 그의 자이니 세간에는 옥녀로 더 많이 알려있다. 공은 임진왜란때 호성공신에 오른 명고공 전의 후손으로 풍천인이다. 공의 고조는 통덕랑 성직이요 증조는 통덕랑 태관이며 조부는 절충장군 원준이고 고는 선략군 낙호이고 비는 한양조씨이다. 공은 서양세력이 점차 동양으로 몰려 옴에 동양평화에 먹구름이 감돌던때인 1872년 임신 4월 29일 경기도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에서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대하며 언행이 신중하고 인품이 출중하였으며 효제충진의 자품이 남달랐으니 조국의 장래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분이 분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제국주의자의 침략으로 국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토에서 청을 구축하였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함은 물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마져 축출한후로는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상상의 비준없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이의 불법성을 해야특사로 하여금 만국공론에 호소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국군마저 해산하는등 천인이 공노할 미증유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배달민족의 분노는 요원의 불길이 되어 을미년을 시발로 정미년에 이르도록 한토 곳곳에는 창의의 깃발이 하늘을 뒤덮고 저주의 함성이 산하를 진동했다. 이를 바라본 공은 풍전등화같은 조국을 구하고자 농공상부의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분연히 궐기하여 구국동지를 규합한후 을사5적의 죄상을 25개항목으로 지적하여 낱낱이 성토하니 때는 1907년 7월 20일이었다. 공은 그해 8월에 이근풍 전봉기 주하용 신규희 조상현등과 더불어 이천에서 창의하여 스스로 좌익장을 맡은다음 이천에 주둔한 일본기병도를 급습하여 크게 타격을 가하고 이천우편취급소 순사분파소를 파괴하니 공의 혁혁한 항일의전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송은 광주군 귀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하여 일본군과 접전한후 포군 70며을 모집하여 용인 굴암산에서 일군불파토벌대와 유격전으로 맞서니 공의 전법은 신출귀몰하였다. 광주와 양근에서 적을 연파한후 다시 이천읍에서 일군중촌소대와 격전을 벌였고 9월에 접어들어 공의 의병부대는 더욱 증강되어 사기충천이었으니 포군 1천8백명으로 안성의 일군을 습격하고 다시 포군 30명으로 양근일대에서 수일간 전투를 벌인후에 죽산군으로 이동하여 문촌리 학일리 고초골등지의 일군 중원소대및 순사대와 교전하고 일암장터에서 일경 주본용사랑들과 교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광주군 쌍림에서 일진회원 한명을 총살하고 백암장터에서 일진회원 한명 순사 한명 순검 한명을 총살하고 죽산군내에서 순검 한명을 생매장하였다. 공은 의병들간의 연대도 도모하여 정주원부대와는 양지 죽산 음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