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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 1860년 수운 최제우(1824~1864)선생께서 창도한 동학은 정선과 역사가 깊다. 1871년 이필제의 난에 가담했던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선생이 피신 길에 오르면서 마침내 당도한 정선. 선생께서는 꺼져가는 동학을 재건하고자 정선 남면 무은담에 있는 강원 도접주 유시헌의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숳하는것과 동시에 비밀포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했다. 그 사이 민심은 요동쳤고, 부패한데다 무능 하기까지 한 조선국 조정은 국가를 운영할 힘조차 없어 외세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에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남접 동학지도자 전봉준과 김개남등이 학정을 일삼던 부패한 탐관오리 부안군수 조병갑을 몰아내며 봉기를 일으켰는데, 보국안민과 척양척왜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정선의 동학농민군은 인근의 원주.영월.평창지역과 마찬가지로 1894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곳곳에 접을 설치하면서 세력을 결집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정선의 농민군 지도자는 정선 여량출신 이중집과 지왈길이었으며 이들은 제천,청중등지에서 들어온 농민군, 그리고 영월,평창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1894년 9월 4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 관아를 점령하였다. 강릉 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한 농민군은 사흘후인 9월 7일 강릉의 관군과 선교장 주인인 전 승지 이회원이 주도한 민보군으로 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고 다시 대관령을 넘어 퇴각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재집결을 시도하였고, 10월 20일경이 되자 영월,평창,제천,청풍지역의 농민군 수천 명이 정선과 평창으로 몰려들었다. '동비토론'에 따르면 이때 정선읍에 3천명, 평창 후평에 1천명의 농민군이 모였다고 하니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농민군이 정선으로 모여들자 정선군수는 도주하였으며, 농민군들은 이방의 머리를 ㅂ고, 강릉관아를 재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농민군이 강릉을 목푤 한다는 정보가 있자 강릉부사가 된 선교장 이희원이 10월22일 전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을 정선과 평창으로 급파했고, 11월 1일에는 강원감영에서 감영 중군과 관군을 내려보냈으며, 11월 3일에는 감영포토사가 인솔하는 관군과 이시모리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 윤교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1월 5일 후평리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곧장 정선으로 향하였다. 11월 6일 강릉 민보군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부대는 여량으로 쳐들어가 10여명을 죽이고 접사 이중집등 5명을 체포하여 이 가운데 이중집, 임순철, 김윤언등 3명은 강릉으로 압송되었다가, 11월 22일 강릉여중 자리에서 포살되었다. 이시모리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감영군은 그 시간 정선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전투는 정선 녹도에서 벌어졌으며 치열했다. 그날 '정선 동학농민군 녹도 전투'로 인해 많은 수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체포된 많은 농민군들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처형되었다. 정선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은 1894년 11월 23일 체포되어 11월 25일 효수되었고, 이후 정선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인근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였으나 최시형선생께서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 해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자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도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선의 동학 관련 유적지는정암사 적조암과 무은담, 화암면 싸내마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