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page


205page

김상의는 음식을 제공하고 승려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주천을사의병'이 북면 마차를 지나 정선,평창에 이르는 동안 세력은 점차 커졌다. 원용팔의병장은 첩자 고영달을 처단하고 우편 선로를 끊고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원용팔의병장은 1905년 8월에 원주 지정면 활곡촌에서 체포되어 1906년 서울 경성감옥에서 4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907년 운강 이강년의병장은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주천 강변에 돌단을 쌓고 의병들의 군례를 받으며 '주천정미의병;의 도창의대장이 되었다. 이 때 주천으로 집결된 의병진은 40여 부대나 되었다. 이강년과 김삿갓면에 사는 중군장 김상태의병장은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일본군제47연대장 나마타메대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주천을미의병'은 수주면 전투, 주천 다래산전투, 영월 덕포리 독산(여우고개)전투, 남면 창동리전투등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은 1908년 청풍 까치성전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