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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당시21세) 광주군 노포면 판교공원에 안장 1965년 2월 2일 충북 충주 출생 1983년 2월 경복고등학교 졸업 1983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자연 4계열 입학 1984년 3월 서울대 자연대학 미생물학과 진입 1984년 7월 감리교 자교교회 청년회장 1985년 3월 자연대학생회 부학생회장 및 미생물학과 학회장 1986년 3월 자연대학 학생회 학생회장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1986년 5월 3일 운명 |19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86년 4월 28일 아침 9시30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반전반핵 양 키고홈”“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 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자연대 학생회장이던 동지는 전방입소 거부투 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 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 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진압에 맞서, 두 동지는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시뻘건 불속에서“양키고홈”을 외치던 두 동 지는 추락하여 10분간이나 방치되었다. 동지는 전신 60%의 3도 화상을 입었다.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진 두 동지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으 며 병원 주변은 전경차량 6대와 사복경찰버스 2대가 배치되어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미제의 예속 정권은 ’81년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양키의 용병교육인 전방 입소 훈련을 강제적으로 실시하여 왔으며, 이에 두 사람은“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한반 도에서 핵무기와 미군을 철수시켜 전쟁을 방지하고, 핵전쟁의 참화로 멸족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미제의 예속과 억압을 뚫고 자유와 해 방을 찾기 위해 최선봉에서 투쟁한 것이다. 동지는 5월 3일, 이재호 동지는 5월 26일 운명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 구국투쟁은 급속히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의 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 게 되었다. 끝내살리라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