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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현 (당시21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2년 3월 1일 출생 1981년 한양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 교내 써클 민속문화연구회에 가입, 대학연합 민속문화연구회와 야학도 함 1983년 4월 2일 강제징집 7월 2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17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81년 한양대학교 기계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가정의 어려움 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던 동지는 대학 1학년 때 민속문화연구부에 가입하고 선배와 함께 탈연합회에서 활동하였다. ’82년 민속반이 학교의 방해로 등록을 하지 못하자 친구들과 소그룹을 형성하여 활동하며 부천에서 야학 활동 을 하기도 했다. ’83년 1월 부천의 야학에서 활동한 선배의 조사과정 중 동지의 이름이 나오자 성동경찰서는 동지를 끌고가 조사를 하면서 구타를 가했다. 조사 이후인 4월 1일 수원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늑막염이라는 병으로 군대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다음날인 4월 2일에 경찰서에 오라는 소식을 듣고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2~3주 후에 동지의 옷이 집으로 우송되자 가족들 은 그때야 비로서 동지가 강제로 군에 끌려간 것을 알았다. 동지는 입대 후 훈련 소에도 가지 않고 4월 10일부터 18일까지 직접 군수사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에 대해 진술해야 했다. 당시 도망다니다가 5월 9일 시위를 하여 조사를 받던 한 동 료의 말에 따르면, 조사중 한 수사관이 동지가 똥물을 토하면서 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동지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려주고 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7월 2일, 부대로부터 전보로 자살통보가 와서 형님이 가보니 두개골이 없는 참 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일부 기관에서는 동지가 가정 파탄을 비관하여 자살하 였다고 하나, 가정불화는 동지가 고 3때의 일이며 대학입학 후 동지의 건강한 생 활태도와 행적을 볼때 죽음의 직접적 계기가 될 수 없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육군 사단 신병교육 훈련 중 보안부대에서 1 주일간‘녹화사업’심사를 받았으며, 이때 운동권 동료들에 관한 진술을 강요받 았다. 녹화사업 심사 후 보안사령부는 동지에게 프락치 활동을 종용하였다. 실제 6월경 프락치 활동을 명목으로 주어진 휴가로 서울에 왔으나, 자신으로 인해 타 격받을지도 모르는 운동권 선후배들은 만나기를 피하였고, 죄책감과 앞으로의 프락치 활동 요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다 극도의 자책감과 부담감에 시 달리던 중 더 이상의 보안사 공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83년 7월 2일 훈련 중 벙커에서 자살하였다고 밝혔다. 끝내살리라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