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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당시22세) 남원 선산에 안장 1966년 11월 29일 전북 남원 출생 1982년 용북중학교 졸업 1983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1983년 8월 (주)대우 조선 입사. 조립2부 근무 1987년 8월 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들과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2시 40분경 폭력 경찰이 쏜 최루탄을 오른쪽 가슴에 맞고 대우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3시 30분경에 운명 |14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어려운 집안형편을 돕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산업현장에 뛰 어들게 되었고 월 30만원의 임금, 월 560~580시간을 일해야 하는 지옥같은 생 활 속에서도 꿋꿋이 살고자 했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고에 이어 7월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가기 시 작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 투쟁은 대우조선에도 휘몰아쳤다. ’87년 8 월 대우조선 노동자들은‘노조결성’, ‘임금인상’등을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를 결성하며 회사와 협상을 시도하였다. 결렬되는 협상과 회사의 기만적인 태도에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하였고 평화 적 시위를 선언했지만 경찰은 무차별하게 진압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을 더욱 더 분노하게 했다. 대우재벌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을 무성의와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대우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해 또다시 평화시위를 벌이기 도 하였다. ’87년 8월 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 가족들과 평화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지 않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앉은 걸음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은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 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들과 임산 부까지 나선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던 와중에 동지가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하였다. 장례행렬이 민주열사들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런 장지의 변경 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인경찰 구속과 피해보상, 휴업 조치 철회의 조건이 수락 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일제히 일방적으로 보도하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였다. 여기에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하여 남원의 선산에 안장하여 동지는 죽어서도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또 한번 죽음을 당하였다. 끝내살리라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