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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 노동자 동맹파업이 전개되었다. 1986년에는 5∙3 인천투쟁 등 많은 정치투쟁이 두드러지고 지역단위의 가두투쟁들이 활발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명성사건 등 권력형 비리가 잇따라 터져나 와 정권의 도덕성에 흠집이 잡혔다. 그러다가 1985년 후반 대통령 직선제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하며 위기에 봉착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 위기를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1986년 7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5공화국을 결정적인 위기로 내몰았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개헌논의를 중지하고 임기 내에 개헌을 하지 않 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학살, 구속과 고문으로 정권을 유지 해온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투쟁은 각계 각층의 참여로 발전하며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역사적인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정권은 6∙29선언으로 분노를 잠재우려 하였다. 그러나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과 학생들의 자리를 생산현장의 실질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분노로 이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현장의 민주화, 민주노조 활동 보장을 요구하는 대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자 는 민주노조를 세웠고, 노동자간 연대를 경험했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들의 투쟁 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조합원 이석규가 죽음을 당한다. 경찰은 시신탈취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투쟁의 확산을 막 았고, 대투쟁의 불길은 대통령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사그라들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참조 끝내살리라 |115| 1980~1987 ‘암흑기’였다. 그러나 수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민중 투쟁의 저수지가 만들어지 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진영은 민중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 게 하며 노동현장으로 투신하였다.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 학계, 예술 등 진보진영 전체에서 변혁운동 이념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정치의식의 고양을 모색하는 시 기였다. 1983년 이후 전두환 정권은 소위‘유화정책’을 폈다. 올림픽 유치, 중고등학생 두발 및 교복자율화, 야간통행금지 해제, 제적학생 복학과 민주인사 복권 등 유화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다. 이 유화분위기는 폭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한 결과로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했고, 민중운동진영 진출의 기회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전방 입소 반대투쟁, 학원민주화투쟁, 학생회 부활투쟁 등을 전개하며 대중조직을 통한 투쟁을 벌여갔다. 한편으로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등 반미투쟁을 선도적으로 벌여 미국이 한국 사회에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나가기도 했다. 각종 유화조치 속에서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지만,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 투쟁도 확산되어갔다. 1983년말 이리지역과 인천지역 해고자들이 전개한 블랙리스트 철폐운동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창립 등이 이어지고, 청계피복노조 는 강제 해산이래 합법성 쟁취투쟁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악법에 대한 법개정운동도 전개하였다. 신규노조결성투쟁과 노조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 는데, 특히 1984년 5월 25일 대구에서 시작된 택시운전기사들의 파업시위는 1984 년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1985년에는 민주노조가 결성된 사업 장들이 임금인상투쟁을 주도하며 노동조합이 어용화 되거나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 장에서도 임금인상과 체불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조건개선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이 대기업 남성사업장에서 전개되었고 50년 |11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