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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병 (당시39세)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출생 1953년 부산사범학교 입학, 사회과학이론연구회‘암장’만듬 1956년 부산대 교육학과 입학 1959년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편입, 경희대학교‘민족통일연구회’만듬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결성준비위원회’경희대 민통련대표 참가 1961년 9월 5∙16 이후 구속,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위반으로 혁명재판에서 15년형 (7년 복역) 1968년 4월 출소 1971년 경락연구회 창설 1972년 삼락일어연구소 강사 1974년 4월 이른바‘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9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의 생애는 철저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60년 11월 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에 걸쳐 세미나와 대강 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 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 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동지는 각종의 강연회, 후보지원 연 설을 행하였지만 특히 기억에 남을 명연설은 ’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경 찰추산 4만 인파가 몰린 가운데 개최되었던‘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행한 연설이었다. 동지는‘남북학생회담을 환영한다’는 연제로 열변을 터뜨려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날의 감동은 지금도 이어져 이때 연설에 서 선생이 외친‘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지금의 통일운동가들에 의해서 외쳐지고 있는 것이다. 5.16군사 쿠데타시 피검된 동지는 혁명 검찰부에 의해 학생으로서는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62년 실형 15년이 확정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다른 민통련관련자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반면 선생은 특 A급으로 분류되어 중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통련 활동뿐만 아니라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 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점, 민족일보 관련 사실등 대중선동가와 이론가로서 그의 잠재적 역량에 대한 군부파쇼의 평가 때문이었다. ’68년 4월 17일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동지는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은밀한 접촉을 재개하게 된다. 독서 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가던 동지는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인혁당 재건 위’사건으로 불법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일년 동안 혹독한 고문과 협박 으로 일관된 조작 수사를 받고 우리 곁을 떠났던 것이다. 끝내살리라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