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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개발’이란 이름 아래 숨겨진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지식인, 양심 세력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 사회에 노동자가 있다는 것을, 그 노 동자가 저항한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저항은 1970년대 민 주노조의 형성과 활동을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정권의 억압과 수 탈 아래 죽어간 노동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 도상사, YH무역 등 여성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은 절규를 했습니까. 그들의 피와 눈물은 박정희 정권을 몰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총과 탱크로 밀고 들어와 광주를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도시로 만 들고 들어선 전두환 군부정권의 총칼아래 한국사회는 또 한번 좌절을 겪어 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 민중은 민주주의 나무 심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삼청교육대, 민주노조 해산, 블랙리스트, 위장취업자 색출 등 으로 기본적 권리마저 옥죄었지만 탄압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저항도 깊고 넓어졌습니다. 광주의 기억은 진보진영을 저항의 대열로 나서게 했고, 노동 자 민중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매김시켜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 갔습니다. 1987년 6월, 군사독재와 정권 연장에 반대하는 시민 학생들의 항 거는 명동 거리를 메웠습니다. 7, 8, 9월 노동자들은 생산현장의 실질적 민 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을 뒤흔들었고 민주적 노동조합과 그 연대조직을 형 성해 사회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노동자가 당당하게 사회에 등장하기까지 전두환 정권하에서 죽어간 열사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박영진 열사, 이석 규 열사,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생산현장으로 들어와 이름도 없이 죽 어간 동지들도 있습니다. 끝내살리라 |9| 우리가투쟁하는한, 열사는살아있습니다 발간사 우리는‘민주’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많은 동지들의 피와 눈물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독재정권 아래서도 끊임없이 저항했던 노동자 민중은 흔적도 없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기도 했습니다. 극렬한 저항으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우리가 말하는 민 주주의는 피의 역사인 것입니다. 열사를 통해 현대사를 말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이 승만 독재 정권 하에서 쓰러진 진보인사들과 반공 국시 아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민중들이 있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 나무를 심는 가 싶더니 군사쿠데타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박정권은 사회 통제와 군사문화를 통해서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 속에서 노동자 와 민중은 시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 청계천 재단사 전태일의 죽음 |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이수호 | 민주노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