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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28년 대구에서 출생한 동지는 공산국교, 대구국교 등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 였다. 4.19 이후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위원회 사무국장등으 로 활동하다 ’64년 1차 인혁당 사건시 연행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에도 계속 유신반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다 유신독재권력에 의해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사형당했다. ’75년 4월 9일 이날은 국제 법학자협회에 의해‘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 된 날이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조작된 8명이 유신 정권의 철저한 조작으로 사법살해된 날이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권 18 년간의 여러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이다. 굴욕적 인 한일회담으로 야기된 6.3 사태의 과정에서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고,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통해 대구지역인사들을 도예종씨를 당 수로 하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1차 인혁당 사건은 검찰 조 사 과정에서 고문을 통한 조작이 밝혀지고, 아무 증거도 없이 조작된 사건의 기 소를 이용훈 부장검사 등 3명의 담당 검사가 거부하면서 이들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게 되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진다. 당시 중정의 대대적인 발표와 달리 도씨 등 몇명만이 인혁당과는 무관한 과거의 사상적 경향을 이유로 실형을 받고 사건 은 일단락된다. 중정의 사건 조작이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이 다시 세인들의 관심 을 끌게 된 것은 1차 인혁당 사건 발생후 10년이 지난 ’74년의 일이다. 유신에 항 거하기 위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가열되고 조직화되자 위기를 느낀 정 권은 또다시‘조작’의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정권은 분단 상황에서 국민들이 레 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며 이철, 유인태 등의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으로 역어 사형선고까지 내리 면서 이들 학생의 배후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 지하조직이라며 10년전 사 건 조작에 실패했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체포,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 다고 사건을 발표한다. 바로 2차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이수병씨 등 총 23명이 구속된 이 사건 관련자들은 ’74년 5월 27일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 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기소되어 6월 15일 비상 보통 군법회의 1심 재판을 시 작으로 10개월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게 된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이 사 건의 주요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고, 놀랍게도 판결이 난 그날밤부 터 다음날 새벽까지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된다. 공안관련사범이라 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 4 년은 그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 극히 이례적 인 이날의 사형집행은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길 두려워한 박정희와 중정에 의한 폭거였다. 송상진 (당시47세) 대구 현대공원묘역에 안장 1928년 9월 18일 대구시 동구 백암동 출생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공산국교, 대구국교 교사 1960년10월 4∙19 이후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위원회 사무국장 1964년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1965년 4월 양봉업 1974년 4월 이른바‘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끝내살리라 |93| |9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