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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당시31세) 남한산성 서문 밖 금복리에 안장 1930년 경남 진양 출생 1956년 재일동포 북송반대운동에 앞장 섬 1959년 조봉암 석방운동에 앞장 섬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창간 1961년 5월 18일 연행 10월 31일 사형 선고 12월 21일 박정희에 의해 사형 확인 후 집행 |6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30년 경남 진양 태생이다. 대학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나자 일본으 로 건너갔다. 동지는 민단에서 일하면서 ’56년에는 재일동포 북송반대운동, ’59 년에는 조봉암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4∙19혁명이 나자 동지는 국내로 들어와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 마했지만 낙선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동지는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평화통일론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 발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서울로 돌아온 동지는 ’61년 2월 13일「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사시는 △ 민족 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 노동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신문 △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로 정했다. 민족일보는 분열된 진보세력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민족일보 는 그때까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으로 금기시됐던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많은 지면을 통일문제에 할당했다. 이에 정부는 민족일보를 인쇄하는「서울신문」에 압력을 넣어 신문 조판 도중 인쇄를 중단하는 탄압을 하기도 했다. 5∙16쿠데타가 나고, 전반적인 구속선풍이 불면서 5월 18일 동지를 비롯한 신 문사 간부들은 모두 연행됐다. 그리고 쿠데타세력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특수 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동지에게 적용된 죄목은 간첩 이영근으 로부터 총련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어 무정견한 통일론을 선동해 특별법 6조 를 위반하였다는 것이 요지다. 사실 주식회사인 신문사를 정당이나 사회단체로 보고 이 법을 적용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또 혁명재판소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10월 31일 혁명재판소 상고심은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동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12월 21일 동 지의 사형을 확인했고 이 날 사형이 집행됐다. ’62년 1월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동지에게‘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 그 후‘간첩’이영근은 사망 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 았다. 간첩이라던 사람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한 것은 사실상 민족일보와 동지의 사형이 잘못이었음을 정부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동지는 아직도 복권되 지 못하고 있다. 끝내살리라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