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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가 ’71년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73년 서울에 상경하였다. 혜원물 산, 한품섬유, 태진실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면서 동지는 돈을 벌기위하여 기 술을 익혀고 있었다. ’76년 8월 30일 YH무역에 입사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미싱 을 탄다는 기대, 그리고 사내 기숙사 환경과 다른 하청업체보다 낫다는 것에 더 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 무엇보다 사내 녹지학교를 다니면서 의식의 변화가 생기 기 시작하였다. 근무하던 YH무역은 ’75년 5월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YH무역은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불과 2년만에 노동자 400여 명, 1년 순이익 13억원이라는 한국최대 의 가발업체로 성장하였다. YH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수십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77년 6월부터 단 계적으로 감원을 시작하였고, 추석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공장이전 계획을 발표 하여 무더기 사표를 내게 하는 등 노동조합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동지는 대의원, 노동조합 소그룹‘차돌이’그룹장으로 활약하는 등 열성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 급기야 사측은 ’79년 3월 30일 위장폐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맞선 노동조합의 투쟁은 1차 폐업을 저지 시켰다. 이후 동지는 노동조합 후 생부 책임담당으로 헌신적으로 조합을 이끌어 나갔다. 사측은 노조말살, 강제퇴사, 도급제 엄포 등으로 탄압을 자행하였으나 노동조 합은 이에 맞서 사측의 의도를 분쇄하였다. 8월 사측은 마지막 카드로 2차 폐업 을 단행하였다. YH 노조를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각계인사가 신민당 총재와 면담하여 신민당 에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동지는 신민당사 농성 3일째 밤, 경찰의 폭력진압 에 맞서 투신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생존권을 짓밟는 악덕기업주를 처벌하기는 커녕 정당한 폐업철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 동지를 죽음으 로 내몬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부 마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18년에 걸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김경숙(당시21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58년 6월 5일 전라도 광산군 비야면 출생 1971년 초등학교 6학년때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 1976년 8월 30일 YH무역(주) 입사 1978년 3월 YH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 1978년 7월 YH 노동조합 소그룹‘차돌이’그룹장으로 활약 1979년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폐 공장점거 농성. 5일동안(폐업1차 철회함) 동지는 후생부 책임담당으로 활약함 1979년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101호작전’에 의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투신하여 운명 끝내살리라 |53| |5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