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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봉제 일을 했던 아버지의 수입으로 생활했던 동지의 가족에게 가난은 언제나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있었 으나 어려운 집안 살림을 위해 다니던 국민학교를 그만두고 껌, 신문팔이, 구두 닦이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동지는 가난한 가계를 도왔다. 하지만 이렇듯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잠시 가정형편 이 나아져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다 1년이 채 못 되어 학교생활을 마감하 고동지는16살때부터평화시장봉제공장의시다로노동자의생활을시작하였다. 봉제공장의 열두어 살 소녀들이 하루 열네 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월급도 제대 로 받지 못하고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이나 위장병을 앓으며, 종일토록 햇 볕 한번 못보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다니면서 잔업, 철야, 특근에까지 시달리 며 먼지 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으려 타이밍(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바늘 끝으로 제 살을 찍어대고 있었다. 이렇듯 손발이마비되도록일해도 생계마저위협받는청계천여성노동자들의비 참한 모습을 본 동지는 착취와 혹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없애 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버스비를 아껴 어린 여성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등 온정을 베풀었던 동지는 평화시장 근로조건이 개선되어야 할 필 요성을절감하고미싱사월급도포기하고재단보조를거쳐재단사가되었다. ’69년6월부터재단사친구들을찾아다니며‘바보회’모임을조직하고밤이새도 록‘근로기준법’조문을뒤지며아무도가르쳐주지않은노동운동을시작하였다. 먼저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 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바보회’를‘삼동친목 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 대신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했다. 직접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 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청 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근로 조건 개선 없이 업주들의 횡포와 노동부 등 정부당국의 멸시가 이어지자 동지는 삼동친목회를소집하여 ’70년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마침내 동지는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의 의미를 담아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 법을 지켜라!”“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산화하였다. 전태일 (당시22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1963년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정 사정으로 그만둠 1964년 단신으로 상경한 어머니를 찾아 막내 동생을 업고 뒤따라 상경 1965년 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이후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바보회’조직함 1970년 4월~8월 서울 삼각산의‘임마뉴엘 수도원’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4개월 가량 잡역부로 일하며, 이 시기에 평화시장의 형제자매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림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불꽃같은 짧은 삶을 접음 끝내살리라 |49| |4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