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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반대투쟁,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유신체제 초기에 침묵하던 학생운 동은 1973년 들어 유신반대 운동의 물꼬를 트고 전국 투쟁으로 번져갔다. 전국적 조직적 투쟁을 위해 만든 전국민주청년학생운동연합(민청학련)은 종교, 학계 등의 세력과 조직적 연관을 갖고 민중적 민족적 민주적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정권은 이 사건과 관련해 대대적인 검거와 주동자 사형 선고 등으로 탄압을 가했다. 학생 들은 교회나 학교의 비공개 이념서클로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노동자 투쟁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으로 폭발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고 도성장의 논리에 묻혀 있던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사회 전면에 고발했다. 전태일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되고, 국가권력에 대 항한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동일방직노조, 원풍모방노조 등 민주노조의 투쟁이 이 어졌다. 유신 말기 YH무역노조 여성노동자 200여 명이 일방적 폐업공고에 맞서 신민당사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공권력 난입으로 농성이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경숙 동지가 투신하여 운명했다.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유신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부마항쟁과 10∙26사건 등으로 이 어지며 박정희 정권의 18년 독재는 끝이 난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참조 끝내살리라 |47| 1961~1979 ‘중단없는 전진’이라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장기집권의 토대로 작용했다. 민 중은 보릿고개를 겪으며 가난에 찌들어 살던 때와 비교해 농촌과 도시 모습이 변해 가고 공장이 세워지는 광경을 보며 긍지를 느꼈다.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기 연임을 허용하는 3선개헌을 추진 했다. 야당과 학생들은 3선개헌을 반대하는 투쟁을 격렬하게 벌였다. 그러나 3선개 헌안은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성을 부여받고 1인 통치체제를 굳혀갔다. 1960년대 말부터 차관경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미국과 중국의 긴장관계가 완화 되었다. 국내에서도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된 노동자 저항과 광주대단지 투쟁 등 민중의 저항이 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 하나로도 사회 를 통제할 수 있던 긴장의 고삐가 느슨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억압적 통제기구를 새 롭게 정비해야 했다. 유신체제를 구축하고 다양한 국민동원체제(민방위훈련, 새마 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등)를 만들어야 했다. 이 시기는‘긴급조치 시대’라 불렸 다. 박정희는 억압을 통해서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신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정권에 맞서 학생, 종교인, 재야인사, 그리고 일부 야당세력으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진영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독재권력과 독점자 본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반독재민주화투쟁흐름 속에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요 역량은 학생, 지식인들이었다. 한일회 |4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