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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당시37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52년 5월 20일 충북 충주에서 소작을 짓던 이도희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79년 국민학교 졸업 후 머슴살이, 생선장수, 이발사, 우체국 집배원생활 1985년 거제도로 옮겨와 대우의 하청 회사인 성흥사, 한국의장 등에서 일하며 노동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듬 1988년 7월 한겨레신문 창간이후 거제지부 총무로 일함 1989년 7월 아내와 노점상 시작 10월 16일 12시 50분 현 정권의 무자비하고 대책 없는 노점상 철거에 항의하며 분신 12월 11일 운명 |45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중퇴 후 머슴살이, 생선장사, 이발사, 집배원 등을 하며 15년간을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며 고된 삶을 살았다. 결혼한 이후 거제도로 이주하여 대우중공업의 납품업체인‘성홍사’에서 노동자 로 취업하여 노동과 생산의 기쁨이 수탈과 착취로 얼룩지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 며‘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성흥사가 폐업하게 되자 한국의장에 취업하였으나 ’88년 노조결성 추진과 조 합 활동에 대한 감시와 해고위협으로 현장노동자로서 생활을 정리하고 한겨레신 문 거제지국 총무로 일하면서 대우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을 지원하였다. ’89년 6월부터 부인과 함께 힘을 합쳐 호떡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고자 거 제군 신협읍 읍사무소 앞에서 노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읍사무소는 대책도 없 이 단속과 철거를 자행하였다. 몇십만원이나 밑천을 들어 몇 푼 벌지도 못한 상 태였다. ’89년 10월 16일 신현읍 개발과장을 반장으로 한 노점단속반이 거제군 농촌지 도소 앞에서 손수레를 끌고갔다. 부인이 이에 항의하던 중 밀가루 반죽을 오토바 이에 싣고 온 동지가 통사정을 해도 듣지 않고, 읍장은 뒤늦게야 나타나 콧방귀 만 뀌며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동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휘발유를 몸 에 끼얹고 불을 당겼다. 이를 본 직원들이 멍하니 보는 사이에 3도에 이르는 치명 적인 화상을 입고 거제 기독병원, 마산 고려병원, 부산대병원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진료를 포기하여 영도의 해동병원에서 57일동안 생사를 헤매다 12월 11일 새벽 12시 40분에 운명하였다. ‘노태우정권에이몸불살라경고한다. 법질서확립과거리질서확립이라는구실로아주빈 약하나마도시빈민들의생계수단인거리노점상과생활의터전을짓밟으며, 관권을빙자한철 거반원들의 폭력에 수많은 부상과 처절함이 안방브라운관에 비쳐지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 고 간 생명이 있었다. 나 또한 오늘 강제철거를 당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 몸 불사른다. “”이란물처럼가는것이다. 이런형태가법이다. 나의동지들이여이순간을생각하라.’ - 유서중에서- 끝내살리라 |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