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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률 (당시48세)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에 안장 1941년 7월 10일 충남 논산군 강경읍 동흥 출생 1970년 11월 14일 결혼, 직업은 양복 재단사 1989년 돈암, 동소문동 세입자 대책위원회 부회장 역임 1989년 2월 18일 술에 취한 가옥주 신광선이 휘두른 칼에 찔려 운명 |44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88년 4월 결성한 돈암∙동소문동 세입자대책위(이하 세대위) 1년 동안 수차례 의 강제철거와 조합이 고용한 깡패들과의 계속되는 충돌에도 불구하고, 삶의 자 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재개발조합과 건설회사는 계획적 인 내부분열공작을 벌여오면서 구속자를 유발시키고, 이를 협상의 조건으로 내 세웠으나 세대위가 이를 반대하며 완전한 삶의 자리를 주장하자 대대적인 강제 철거를 감행해 오고 있었다. 동지가 사망한 2월 만해도 2번의 강제철거를 시도했 으나 주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막아내고 있던 상태였다. 더구나 이 시기가 재개발 조합장의 임기가 끝나가는 상황이었으므로 세입자를 내쫓으려는 재개발조합의 수단과 방법은 더욱 악랄해진 상태였다. 그러던 ’89년 2월 18일 돈암동 세입자 김성원씨 집에 가옥주가 술에 취한 채 당 장 집을 비우라고 소란을 피우자 김성원씨의 부인이 공포에 질려 세입자 대책위 원회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였고, 달려온 동지가“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하자”며 다가갔다. 그때 가옥주는 우유각 속에 감추었던 식 칼을 꺼내어 동지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급히 고대 혜화병원으로 옮겼으나 운명 하고 말았다. 동지는 당시‘1000여 세대의 생존권 쟁취와 임대주택 쟁취’를 위해 차라리 내 가 구속되겠다는 의지로 투쟁하였다. 1월에 3명이 구속되고, 회장마저 구속될 위 기에 처하는 등 계속되는 탄압과 긴장되는 순간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특유 의 사투리와 구성진 말로 동지들의 긴장을 풀어주곤 하였다. 또한 2월 2일과 15일 철거 때도 몸소 각목을 들고 22개 초소를 밤새워 돌면서 수고한다는 말과 열심히 투쟁하자고 격려하던 동지는 말보다는 행동을, 이기심 보다는 희생정신과 헌신적 활동을, 사소한 차이와 대립보다는 단결과 협력을 몸 소 실천하였다. 동지는 평소 유달리 유언 비슷한 말들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정한 빈민해방 노동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하겠다는 비장한 결 의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동지의 죽음은 본질적으로는 독점건설재벌과 정부가 세입자들의 생존권을 무시 하고 오직 있는 자들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재개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한강제철거의무자비한폭력성과비도덕성이적나라하게보여진것이기도하다. 끝내살리라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