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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당시26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6년 서울 출생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중퇴 1988년 3월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입학, 심산연구회 가입 활동 1989년 심산연구회 회장 역임 1990년 동아리 연합회 총무부장 역임 11월 동아리 연합회 부회장 출마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하여 시위 도중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운명 |41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대학 입학 후‘심산연구회’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중을 고민하는 책임 있는 운동가로 삶을 실천하던 중 백골단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운명하였다. ’91년 5월 25일‘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 회’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 학생 등이 대한극장 주변에 약 1만 여명이 집결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3만 여명으로 늘어났고 5시 20분경 전경과 백골단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하였다. 이날 동원된 경찰은 15개 중대 1천8백여 명이었고 이 때 10분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의 양은 다연발 1백60발, 사과탄 1백14발 KP탄 6백72발 등 모두 9백46발 이었다. 처음에는 경찰이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동지가 발견된 골목 앞으로 시위대를 떠 밀었다. 시위대의 절반 정도가 골목을 통해 빠져나가던 중 중간에 백골단이 골목 의 입구를 차단, 시위대를 U자로 포위하고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의 머리위로 던지면서 방패와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우들이 부상당하였 다. 당시 골목 앞에는 승용차와 봉고차가 주차 중이었고 골목의 폭은 4m정도였 다. 최루탄은 쉬지 않고 터졌고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에 여기저기 널브 러져 토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 위를 뛰어다니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학생이(김귀정 동지로 추정) “아저씨, 때리지 말아 요 . 저 죽어요”라고 울부짖었으나 백골단이“이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 해”하고 몰아 부치며 구타하였다고한다. 이후 골목입구 지점에 동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 으나 백골단은 여기에도 몽둥이질을 서슴치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김지훈군은 골 목을 빠져나갔다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전경이 물러간 후 한겨레신문 사 취재차량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끝내살리라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