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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59년 7월 30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집 행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꿈꾸었던 진보정치가로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현실정치가,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동지에 대한 사형집행이었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양명산이란 인물을 통해 북과 접촉하며 정치자금을 받고 기밀서류들을 넘겨준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무죄로 결론 난 간첩죄를 적용, 사형 을 선고했다. 50년대 중반 진보를 표방하며‘책임지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 주적인 평화통일’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 던 동지.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진보적인 혁신정당, 나아가 이 땅의 진보주의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었다. 동지의 죽음 후 이 땅의 진보주의는 한동안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향했던 동지는 ’48년 5.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현실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 딛는다. 동지는 좌익과 우익 모두를 거부하고 제3의 길-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동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조봉암 (당시61세)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898년 강화 출생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 1년간 복역 출옥 후 동경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 공부 비밀결사‘흑도회’에 가담하여 항일운동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참여 1928년 ML당 활동으로 검거. 7년간 복역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하다가 다시 검거 1945년 광복되어 석방 1946년 공산당 탈당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농림부장관 지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 국회부의장에 선출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했으나 낙선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1958년 1월 13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체포. 진보당 7명과 함께 간첩 혐의로 구속 1959년 7월 30일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형 끝내살리라 |41| |4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이승만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