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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용 (당시20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71년 5월 서울 출생 1990년 서울 동북고 졸업 경원대학교 전산과(2부) 입학 1990년 3월 경원대힉교 민족사 연구회‘한얼’에서 활동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경‘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 |41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세차장 등의 아 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도 누구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또한 못 다한 미술학도의 꿈을「한얼」만평기자를 하면서 펼치기도 했던 동지 는‘말’보다는‘글’에 조리가 있었고 수많은 그림과 글을 통해 선후배와 동료들 에게 자신의 감정과 문제의식, 조언 등을 했다. 또한 동지는 총학생회 산하 선봉 대인‘횃불대’대원으로 모든 교내외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는 등‘과학은 본질적 으로 실천이므로 의식과 실천은 변증법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확신을 변 혁운동을 통해 담보해 내려는 노력을 펼쳤다. 당시 동지는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동지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규탄집회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동지는 이같이 어려 운 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을 깨우쳐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고 자 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91년 5월 3일, 동지는‘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 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리고 몸에 라이터를 갖다댄 뒤“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끝없는 민중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산화해갔다. 끝내살리라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