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민중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생활을 해야했다. 영세농민은 파산하여 도시로 몰려 들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대한노총 산하 단위노조를 중심으로 임금인상과 해 고반대 투쟁들이 진행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관계법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에 경종을 울렸고, 정부 수립 5년이 지나서야 노동관계법령이 만들어졌다. 노 동자들은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내걸고 대한노총을 부정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를 결성하였다. 대학생들은 학원 민주화투쟁을 벌여나갔으며 소규모 이념써클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3월 15일 부정선거를 계기로 ‘4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대학생과 시민, 노동자, 중고등학생, 국민학생까지 참여 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미국은 이승만 정권 지지를 포기했다. 결국 이승 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과도정부가 세워졌으나 분출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을 수 있는 정권은 아니었다. 이 틈을 타 당시 정보력과 조직력을 갖고 있던 군부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지배계 급은 50년대 말부터 제기된 자본축적 방식의 변화에 조응하고, 대북전선에서 진보세 력과노동계급의저항을통제할필요가있었던것이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참조 끝내살리라 |39| 미국은 원조를 통해 한국을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장으로, 미국 군수산업의 생 산물인 무기 시장으로, 대공산권 방어기지로 만들어갔다. 원조물자는 주로 소비재 와 소비재 산업의 원료였으며 생산재부문은 극히 적었다. 특히 50년대 공업화를 주 도한 것은 완전소비재공업인 삼백공업(면방, 설탕, 밀가루)이었다. 이는 국내의 밀∙면화 생산을 도태시켰으며 미국의 잉여농산물 때문에 국내 곡물값이 떨어져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자작농은 파산하여 도시 주변의 값싼 노동력으로 변화 되었다. 농민은 파탄지경에 이르고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친이승만 인사들이나 친일매판 자본가, 일제시대 대지주에서 산업자본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일부 지주계급은 귀속재산과 원조물자를 바탕으로 삼아 성장하였다. 귀속재산 불하 과정에서의 특 혜, 원조물자 특혜, 금융 특혜 등으로 자본을 축적한 50년대 자본가들은 정치권력 과 결탁하여 관료독점자본으로 성장해갔다. 이승만의 정권유지를 위한 조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자유당 지지율 하락에 위 협을 느끼면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단체법 개악, 언론 탄압 등을 통해 장기집권 음모를 꾀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말기적 증상은 3. 15부정선거로 절정에 이르러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미국의 원조가 유상차관으로 전환되고, 산업이 정체되고,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3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 한국전쟁~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