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page

최 동(당시30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0년 8월 14일 서울 출생 1980년 3월 성균관대 입학 1984년 10월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1989년 9월 4일 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 집행유예로 출소 19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하여 운명 |32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민주화열기가 한창이던 ’80년에 대학에 들어간 후 곧바로 성균관대의 대표적인 이념써클의 하나였던‘동양사상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80년 3월 성균관대에서는 전국 최초로 연일 수천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병영집채거부운동이 벌어졌고, 동지는 이때도 중심적으로 활동하였는데, 3차 입 소까지 거부하고 마지막 남은 수십 명 중에 속하였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동지는 합법 써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심산연구회’라는 공개써클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83년 5월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요구 하며 학내의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되어 첫 감옥생활을 시작하였고, 출소 후 복학 허용이 정부의 개량화 조치에 말려드는 것이라며 복학을 반대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89년 구속될 때까지 집을 떠나 부천의 월세방에서 지냈다. ’84년 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동 지는 줄곧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86년경 반제동맹당 사건의 여파로 수 개월간 도피생활을 했으며, ’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인천지역 노동자연맹 준비 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통령 선거투쟁에 참여했고, ’88년 3월 창립한 인노회 결 성에 산파 역할을 했다. ’89년 2월 검찰은 6공들어 처음으로‘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하여 인노회 관 계자 6명을 구속했다. 동지는 이 사건으로 치안본부 대공 3계 요원들에 의해 연 행, 구속되었고, 이 사건이 공안당국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된 조직탄압 차원의 수사임을 간파한 동지는 다른 동지들이 대처할 시간을 벌게 하고, 취조에 불응하 고 자해를 기도했다. 약 20여일에 걸쳐 조사를 받은 동지는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하면서 잠을 안재우거나, 안기부에 넘기겠다고 협박하는 등 정신적 압박감 이 극에 달하는 수사과정에서 또다시 자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고문과 투쟁과정에서 동지는 극심한 불면증, 실어증에 시달렸고 증세 가 악화되어‘우울증과 정신분열증세’라는 진단을 받았다. 출소 이후 신경정신 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며“적들이 나를 무능력하 게 만들었다”고 말하며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동 지는“건강이 좋아져야 자신의 억울함을 폭로할 수 있다”며 건강회복을 위한 노 력을 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상태가 다시 악화되고 ’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 분경 분신,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