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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기 (당시25세) 파주 금촌 공원묘지에 안장 1964년 12월 18일 서울 출생 1983년 3월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1986년 5월 5∙3인천 투쟁에 참가하여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음 1988년 7월 덕진양행 입사 1988년 11월 29일 덕진양행 노조결성, 위원장으로 선출됨 1989년 4월 3일 협상 결렬에 항의, 분신하여 운명 |29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국민대에 입학하여 동아리‘청문회’에서 활동하며 사회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동지는 ’86년 5∙3 인천투쟁에 참가하여 실형 1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소 후 노동자와 삶을 함께 하고자 ’88년 7월 덕진양행에 입사하였다.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11월 29일 남자 기숙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 에 선출되어 회사 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 측의 야비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교섭은 계속 결렬되었고 공장장 과 구사대는 조합원을 구타, 폭행, 노조 집단탈퇴 음모를 조작하며 단전, 단수, 전화 불통 조치를 취하고 업무집행 방해, 퇴거불응 명목으로 고발하는 등 숨 막 히는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급기야 1월 중순에는‘공장이전’이라는 신종 노조 탄 압을 성남지역에서 최초로 휘두름으로써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어놓으려 하였다. 이에 덕진노조는 동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경비절감 한다더니 땅값 비싼 서 울이전이냐. 서울이전 철회하라!”외치며 2월 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그 이후 지속적인 교섭결렬로 3월 30일 10차 교섭까지 결렬되자 파업투쟁 47 일째인 4월 3일 동지와 노조지도부는 이 협상이 마지막이라는 굳은 결의와 각오 로 협상에 임하였다. 그러나 사장이 계속 억지 주장만 되풀이 하며 또다시 협상 이 결렬되자 이에 격분한 동지는 공장 이전 철회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도중, 온몸에 펑하고 불이 붙어 쓰러져 병원으 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