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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우성택시 90여 조합원들은 ’87년 11월 마산, 창원지역 43개 택시 회사중 노동 조합이 구성된 24개 노조노동자들과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공동대표협의회를 구성, 연대파업을 통해 11월과 12월의 공동 교섭과정에 택시사업자연합대표와 노조 대표자 협상 자리에 안기부 직원이 배석하여 강제적 합의를 도출시키고자 위협성 발언을 하는 등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대해 마산, 창원 지역 택시노동자들은 사업주의 성의 있는 협상자세를 요구하며 집회 등을 개최하였으나,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연행되거나 다쳤다. 지역단위 공동교섭이 중단되고 각 단위별 협상으로 전환되었다. 동지는 우성 택시 노동자들과 함께 3개월간 노조사무실에서 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 ’88년 1 월 6일 2시경 회사 대회의실에서 노사간 토론형태의 노사협의에서 사측은 고압 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특히, 주요 쟁점이었던 징계자 전원해고에서 주모자 선별 해고로 노조측이 양보하였으나, 사측은 노조의 양보만을 요구하여 회의가 지연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동지는 6시 30분경 회사 측의 협상자세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을 시도하여 부산 복음 병원으로 옮겼으나 1월 8일 0시 53분경 운명하였다. 조합원들은 1월 8일 새벽, 시신을 우성택시로 옮겨 회사 내에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객들을 맞으며‘산화한 동지의 뜻을 결코 헛되이 않겠다’며 요구조건을 반드 시 관철시킬 것을 맹세하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장례가 끝날 때까지 시신을 지키자며 회사를 떠나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다. 동지는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서도 회장에게“배가 고파서 죽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뭐하러 왔느냐,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고 외치며 분개하는 등 운명 직전까지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장례는 1월 12일 12시, 유가족, 동료 조합원 동지들의 애도 속에 경남택시 분실장으로 치루어졌다. 동지의 분신 항거는 택시업계 사업주 측의 성의 있는 단체교섭과 정부와 공권 력이 회사측을 지원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며 정당한 노조활동을 방해한 것에 대해 이를 폭로하고, 각성을 촉구한 노동기본권 향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 쟁이었다. 이대건 (당시32세) 경남 창녕군 대지면에 안장 1956년 6월 16일 경남 창녕군 대지면 본초리 출생 1978년 상은(주)에 입사 1981년 5월 10일 마산 (주)우성택시 입사 1988년 1월 6일 파업농성 19일째에 협상이 결렬되자 단체협상 위반에 항의하며 분신 1988년 1월 8일 부산 복음 병원 중환자실에서 운명 끝내살리라 |271| |27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