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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대기업 및 사무전문직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졌다. 노동운동과 함께 농민운동, 빈민운동, 학생운동 등 부문운동이 확산되면서 민중 연대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노동자 민중의 연대투쟁 고리를 끊기 위해 탄압을 가했다. 파업현장에는 어김없이 경찰병력이 동원되었고 구사대 폭력 이 난무했다. 조합원과 해고자를 분리하여 철저하게 고립시켰으며 죽음으로 몰아 가기도 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도 노동자 생명을 위협하 는 요소로 부각되었다. 농민들의 시위도 폭력으로 진압했고, 학생들의 학원민주화 투쟁, 통일운동도 경찰병력을 동원해 짓밟았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1991년 민중 운동진영과 정권은 대대적으로 충돌했다. 시위 진압 경찰에 의한 대학생의 죽음으 로 시작된 5월은 죽음 외에 다른 항거 방식을 갖지 못한 노동자 시민의 죽음으로 이 어졌다. 민중운동진영은 광범위한 대책기구를 마련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나 정권 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폭력탄압 속에 노동자 민중의 투쟁 전선은 힘을 잃었다. 이 후 투쟁정국은 선거국면으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지배계급은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려 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참조 끝내살리라 |269| 1988~1992 노태우정권 노태우 정권은 형식적으로는 직선제를 거쳤지만 정권 관계자들이 신군부의 일원 이었다는 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정통성’문제를 늘 정 치적 부담으로 안고 있었다. 그리고 여소야대라는 조건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5 공화국과의 단절을‘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 문제의 돌파 구를‘보수대연합’에서 찾았다. 1990년‘내각제개헌’을 약속한 가운데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 3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3당 합당이 현실화되었다.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이 보수대연합을 강제한 것이기도 하다. 1986~1988년에 걸친 3저호황 이후 대외 경쟁력 강화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정 부와 자본가들은 경제위기론을 유포하면서 그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렸다. 세계경 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지역경제 통합과 블록화로 인해 수입개방 압 력과 통상마찰을 빚었고, 이는 산업구조 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정부와 자본 은 자동화∙합리화의 명목으로 심각한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1987년 이후 급속히 성장한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고도의 인사제도, 노무관리 등을 강화하며 이데 올로기 공세를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자행하였다. 또한 무노동무임금 적용, 업무조 사, 손해배상청구 등 탄압과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설정, 총액임금제, 제3자 개입금 지 등 재벌위주의 노동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사회 조건과 탄압 속에서도 노동운동은 1990년 1월‘전국노동조합협의 회’를 결성한다. 이는 1987년 이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결정체로서 조직역량을 총집결한 것이었다. 전노협 결성 이후 1990년 5월 KBS투쟁과 현대중 공업투쟁 및 그에 촉발된 총파업투쟁은 정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26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