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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문 (당시47세) 인천 천주교 나사렛묘역에 안장 1934년 경북 의성군 옥산면 전흥동 출생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0년 통일민주청년동맹 맹원,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 1961년 민족일보 기사 1962년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 겸 대변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3년 목장경영 1974년 이른바‘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피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1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24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영남일보, 민족일보 등의 기자, 사회당 활동 등을 하였다. ’64년 1월경 ‘인민혁명당’조직부책, ‘민주수호국민협의회’대구경북지부 대변인으로 활동하 였고, ’74년 4월경‘인민혁명당재건위’교육책으로 지명 수배된 후 ’79년 10월 4 일 검거 시까지 5년 5개월 간 수배 생활을 하였다. ’79년 10월 4일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구속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60여 일 간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근안 등으로부터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였 다. 서대문구치소 수감 중이던 ’81년 8월경부터 위장병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구치소에서의 치료로는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가족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경찰병원 정밀검사 결과 위유문부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외래수술을 요청하였으나, 구치소측은 계호 등의 사유로 이를 거부 하고, 구치소 내 병사에 입사시켜 소극적인 치료로 일관하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 어 같은 해 11월 22일 운명하였다. 동지는 수사 과정을 통하여 심각한 가혹행위 를 당하였고, 이러한 가혹행위가 병세 악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구치소장은 수용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방기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79년 10월 4일 체포 당시 자해를 하 여 서울대병원에 20여 일간 입원하였고, 위내시경 검사를 통해 조기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으나 정권은 본인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위암에 대 한 치료도 하지 않았다. 이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0여일 동안 불법구금의 상태 에서 조사를 받았고, 조사과정에서 동지를 비롯한 남민전 관련자들에게 고문 등 의 가혹행위가 심하게 있었음이 밝혀졌다. 끝내살리라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