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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당시21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6년 8월 29일 출생 1973년 광주 동산국민학교 입학 1979년 광주 동산중학교 입학 1982년 광주 진흥고 입학 1986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입학, 동아리‘만화사랑’에서 활동 건국대‘애학투련’항쟁 참가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시위도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SY 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짐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27일 동안 처절하게 투병하다가 운명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거행 |22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12년간 개근상을 받을 만큼 건강하고 성실하였으며, 고등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다. 이렇듯 성 실하고 모범적인 동지의 고민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 비디오를 보고 집회에 참석하면서 동지는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외곽지대,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부끄 러워하게 되었다. 동지는 ’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 심부에 뛰어들었다. ’87년 6월 9일 오후 5시쯤, 연세대 앞에서 시위도중 30~40여발의 최루탄이 난 사되고 교문 앞은 자욱한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곧이어 2번째의 직격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희미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한 동지가 쓰러져 있었다. 한 학생이 동지를 발견하고 뛰어가서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동지의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동지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 기하기 시작하였다. 6월 항쟁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학생들은 낮이면 거리에 나 가 돌을 던졌고 밤에는 병원으로 돌아와 동지의 주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동지의 소생을 비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동지는 최루탄 없는 세상 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동지의 죽음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물러섬 없는 투쟁은 때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준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수백 수천만이 마침내 깨어나 거대한 폭풍처럼 불의와 억압, 착취 를 쓸어버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