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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리는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제주목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로서 국영여관인 이왕원이 있었을 만큼 사통팔달했다. 조선말기부터 동광리지역은 부패한 관리와 토호들의 끊임없는 수탈로 농민들의 원성을 샀는데 19세기에 일어났던 두 차례 민란은 농민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항거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주민들은 미군정에서 일제와 다를바 없는 공출을 요구해서 불만이 컸다. 마침 보리수매 독려 차 마을을 방문했던 관리를 마을청연들이 폭행하는 '성출반대사건'이 발생했고 동광리는 그 후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혀 경찰이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었다. 4.3당시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호), 주수궈(10여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호), 삼밧구석(마전동 45호)등 약 200여호가 있었다.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여 무고한 마을주민들을 희생시켰다. 많은 주민들은 끌려가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당했고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가거나 겹겹이 쌓여 있어서 유족들은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김여수와 임문숙 일가에서는 헛묘를 만들어 그나마 원혼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동광리는 4.3으로 인한 희생자가 160여명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