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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단체 통합의 호산 김동삼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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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감옥 옥중 순국 1927년 4월에는 길림에서 김기풍, 김진호, 이탁, 오동진등 35인과 발기하여 농민호조사를 죅, 재만한인농민의 생활개선과 생산증가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1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동지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항일무장투쟁의 방안을 준비하였다. 1931년 10월 초, 하얼빈의 정인호의 집에 투숙중 하얼빈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후,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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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에 전생을 바치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주민회, 의성단, 광정단등 지방단체들을 망라하여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정의부가 조직되자 참모장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5년 9월 24일,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그를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않고, 동년 10월 10일, 국무령 홍진이 또다시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길림에서 김좌진, 이청천등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자, 위원장 겸 군민의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만주지역 알일무장단체의 통합에 진력하였으나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나뉘어졌다.